본문 바로가기
  • 햇살구름바람산
카테고리 없음

28장(산상수훈 3)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성경 해석본

by 고요한 강 2024. 2. 20.



주님의 기도: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다


산상수훈 (제 3 부)
--------------
(마태 6;1-4)
1.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자선을 베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리라.
2. 그러므로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은 것이니라.
3. 그러나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4. 그리하면 자선 행위가 은밀한 가운데 되어져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친히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
하느님이 햇빛, 공기, 음식, 생명, 사랑, 지혜 등을 끊임없고 아낌없이 주면서도 최대한 비밀스럽고 이름 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덮어 가리면서 주는 것처럼 그의 자녀들도 사심 없고 말없이 주는 은혜로운 기술을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육체에 제한시키는 이기주의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은 “나, 나의 것”이란 의식을 모든 이들을 위한 신성한 포용의 사랑으로 확장해야 한다. 그것은 필멸하는 인생의 이 학교에서 마스터해야할 기본 레슨이다.


의식을 확장시키는 자선과 자만심을 키우는 자선

보시(자선)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느낌을 확장시키는 물질적 표현이다. 그러나 주는 것은 순수한 동기로 해야 한다. 이 일련의 구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자만심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자선-또는 다른 종교 행위-를 사용하는 것을 비난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주는 자의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의 의식을 확장시키기 위해 보시물을 주는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보시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우쭐하면서 종교의식을 이행하는 자는 겸손을 잃은 것이며,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다. 명예를 얻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종교적 믿음을 가장하는 위선자들은 신성한 인식 대신에 세속적인 칭찬을 얻기 위해 영적인 의식(제식)을 사용하는 나쁜 습관을 형성한다. 칭찬받을 만한 행위의 이행으로 칭찬을 받는 것은 더 큰 영적행위를 수행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칭찬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마음을 신으로부터 빗나가게 해서 자아의 자기만족에 중심을 둔다.


화려하게 치장하며 보시하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소유한 자만심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그릇된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미혹시킨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이 신의 땅에 손님으로 지내는 짧은 막간 동안 그는 과거생의 카르마의 척도에 따라 여러 물건들을 많거나 적게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만 항상 하늘의 하사품에 종속한다. 현생과 과거 전생의 육화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시작된 행동들은 인생에서 자신의 머물 장소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필요들과 구조화된 창조에 따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지성, 창조적 능력, 의지력이라는 선물을 사용함에 의해 스스로 선언한 경이를 달성할 것이다. 비록 그가 진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올바른 노력으로 분투함으로써 그것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만들 지라도 최종적인 계산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들이다.


심지어 가장 물질적으로 활동적인 사람조차도 자기중심적 관심사에 편협하게 머물러 있는 한 그의 진화는 보잘 것 없다. 이기심은 대합조개처럼 하나의 몸과 하나의 개성 속에 있는 영혼을 단단히 에워싼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작은 몸과 감각에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느낌을 거의 모르고 있다. 비이기심과 관용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의식의 떨림을 사람이 인식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 즉 그들의 필요사항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면서 물질적 필요, 심리적인 구원, 또는 영적인 계몽이든 무엇이나 제공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과 삶에 그 자신의 의식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마음을 확장시킨다.


선물을 주는 동안 헌신자는 다른 사람들의 몸의 사원 속에 내재하는 주님에게 봉사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가 신에게서 받은 하사품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의 아버지에게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궁핍한 자녀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나 자신들’ 속에 확장된 ‘큰 나 자신’으로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다.


은밀하게 그의 형제들(종교상 형제들)에세 선물을 말없이 주는 자는 다른 가슴들 속에서 하느님의 편재성을 느끼는 천상의 보상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나 지혜의 조언을 해주고 그것에 대해 자랑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행위의 신성함을 파괴한다. “나는 베풀었다.” 또는 “나는 구하기 위해 도왔다.”라고 자랑하는 것은 신성함이 아니라 성자인체-신앙이 깊은 체-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건함을 방송하는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찬미자나 추종자들을 얼마간 얻음으로써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찬양받는 그 자신은 현명한 친구들과 전능한 지혜를 가진 하느님을 멀리 할 것이다. 천국의 법은 계시의 보상을 허풍쟁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재잘거리는 자아는 진리의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세상의 평판을 바라는 허풍쟁이는 선물의 증여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진 좋은 일로인해 어떤 유익한 결과를 거둔다. 그는 적어도 구두쇠보다는 낫다. 하지만 자만심이 많은 기부자는 사람들의 성의 없는 박수갈채의 덧없는 보상으로 만족하며 자기중심 속에 제한되어 머문다. 따라서 그는 하늘의 보상, 즉,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축복된 확장을 스스로 부인한다. 그러나 조용한 겸손함으로 주어진 선물은 받는자의 가슴과 주는자의 가슴이 기쁘게 결합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편재한 영과도 기쁘게 결합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필멸하는 자녀들이나 선한 자녀들이 가진 모든 것-심지어 그들이 스스로 준 것조차도-의 증여자이며 최고의 자선가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해방된 아들들도 무한히 주는 자와 하나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몸속에 있는 하느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무엇이나 제공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모범을 받아들여 훌륭한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들에게 매일 친절을 베풀고 자기가 가진 어떤 세상적 좋은 행운을 최소한 서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더 넓은 범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훌륭하고 신성한 필요들을 지원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언과 동정을 기꺼이 제공한다. 하지만 그들이 힘들게 번 돈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될 때 그들은 “우리는 4인 가족이야 더 이상 안 돼.”라고 하며 가족의 행복만을 챙기면서 지갑을 닫는 “구두쇠”가 되기를 강요당한다. 주식 시장에서 몇 억을 잃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요트나 새로운 고급차를 구입할 때는 전혀 망설이지 않지만 합당한 궁핍으로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로 할 때는 아주 인색하다. 그리고 그들은 토큰을 합해 기부하면서 그것이 정당하고 경제적으로 절약했다고 느낀다.

자기 자신에게는 광고하지 않으면서 사랑스럽고, 자연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후회 없이 최고의 선물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과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조용히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은밀하게 일하는 신성한 공급의 법칙을 발견한다. 신이 주신 소유물 보다 더 많이 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신의 풍요가 흐르는 통로가 열린다.

오른손(또는 바른 마음)으로 줄 때는 왼손(또는 이기심)이 모르게 하여라. 자기를 관대한 기부자라고 생각하며 주는 사람은 자신의 자비심을 거의 의식하지 않으면서 손 크게 주는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에 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면 영은 편재의 지각으로 보상할 것이다. 그래서 신의 편재한 사랑과 지복은 가슴에 숨김없이 드러날 것이다.

---------------------
(마태 6; 5-6)
5 또 네가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 안에서와 길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은 것이니라.
6 그러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너의 골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


하느님의 가슴에 닿는 기도

참된 기도는 영혼의 표현이며 영혼으로부터의 재촉이다. 그것은 내부에서 솟아나 고요하고 열렬히 표현되는 신에 대한 굶주림이다. 소리 내어 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주의력이 신에게 있고 모든 말들이 하느님을 위한 영혼의 큰 갈망으로 그분을 부를 때만이 경이롭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 낸 기도가 내면의 정신보다는 종교의 형태에 기계적으로 집중되어 단지 교회의 예배의식의 일부가 된다면 하느님은 그러한 종류의 기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의 주의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감동시키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말해진 단어들, 즉 자신의 청각신경에 떨어지는 연습된 음조에 집중된다면 위선적으로 되기가 쉽다. 이것이 많은 성실한 영적인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슴에만 접촉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자랑해 보이려는 경향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의 강도가 동시에 증가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타락이 될 수 있다. 영적 실현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든 그것이 외적으로 표현될 때 그 강도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헌신자의 기도가 깊은 내면에서 나올 때 즉, 신을 향한 사랑에 취할 때 주변의 모든 것을 신과의 접촉으로 의식적으로 즐기며, 신을 향한 사랑의 감염으로 의식적으로 마신다. 하지만 헌신자의 의지가 아주 강하지 않다면 주변인들은 신에 대한 사랑을 몰래 훔쳐갈 것이다. 주변인들은 독실한 것처럼 보이는 그를 칭찬하기 시작하며, 그래서 주변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우쭐함을 느끼고, 자신이 훌륭한 사람임임을 느낀다면 그는 약해진 것이다. 그의 신을 향한 사랑은 가슴에서 사라지고 자만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가끔 큰 소리나 속삭이지도 않고 기도 할 수 있는데, 신에 대한 깊은 느낌에 점유되면 어떤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영에게 고요히 예배하도록 하는 내면의 친교, 내면의 비밀이다. 신성한 불처럼 그 사랑은 영혼 주위의 어둠을 태우고, 그 빛 속에서 전능한 영을 본다.

예수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성에 대해 세상의 평판을 얻으려고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충고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은 동기가 경건한 행위와 불이치하기 때문에 위선자들이다. 거짓된 겉치레로 사람들의 헌신을 보장받으려는 의도로 기도하고 신을 내세우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죄이다. 선한 생각을 지닌 믿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영감을 주는 사람은 맹목적인 추종자들의 헌신과 세상적 힘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거짓된 기도에 결코 반응하지 않고 가슴 속을 보는 신은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영성의 쇼를 벌이는 위선자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신과 함께 하는 참된 가슴의 은밀한 로맨스로 얻는 신의 영원하고 모든 것을 속죄하는 축복을 잃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배당에서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기도를 한다. 그러한 기도는 약간의 영감과 헌신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기도는 주의가 외부로 향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신과의 친교’는 일어나지 않는다. 공개적인 기도나 회중기도는 고요하게 격리된 곳에서 하는 깊고, 은밀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기도로 보완되어야 한다.

응접실은 사회생활의 의식을 일깨우고, 도서관은 독서하고픈 마음을 일으키고, 침실은 졸린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고요한 명상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방이나 차단된 구석진 곳, 또는 환기가 잘되는 다락방을 만들어야 한다. 인도의 전통 주택에는 매일 예배드리는 사원 같은 곳이 준비되어 있다. 집안에 있는 성소는 공공 예배 장소와는 달리 개인화되고, 하루 종일 자연스럽게 헌신적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성을 고양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인도의 아이들은 사원을 자주 방문하지는 않지만 부모의 모범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이러한 가정 내의 성소를 통해 가족들은 침묵의 커튼 뒤에 숨어있는 영혼의 평화를 발견하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집 안에 있는 성소에서 가족들은 내관을 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고, 영혼의 내부 힘으로 재충전하고, 신과의 신성한 친교를 통해 식별적 지혜와 조율하면서 인생을 양심의 올바른 판단에 따라 조화롭게 이끌 수 있다. 내향화된 기도는 신성한 이상에 대한 봉사와 평화가 인생의 목표임을 깨닫게 하며, 물질적 획득이 행복을 보증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네 골방에 들어가라”:
“정신적 내향화로 내면의 침묵을 달성하는 기법을 연습하라.”

현대 종교에는 은둔하는 신성한 낭만적인 방법, 즉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이 재발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 탐구를 실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정신적 내향화의 내면의 침묵 속에서 주님과 함께 실제적인 교통을 하기 위한 과학적인 영적 테크닉의 지식이다. 보통 기도와 헌신을 위해 격리된 곳에 머무는 사람들조차도 산만한 잡념들을 쫓아다니느라 참된 예배가 가능하게 되는 집중된 친교의 영혼의 성소에 들어가는 데는 실패한다.

내향화의 과학적인 기술을 알지 못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이 그들의 간청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한 헌신자들은 통화 중인 전화선을 붙잡고 친구에게 응답받기를 바라는 사람과 비슷하다. 이들은 대답받기를 시도했을지라도 “통화 중”이란 신호로 계속 좌절당한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활동한다. 그러한 반응으로 운동신경이 외부로 향하는 정보가 주어지도록 이끈다. 마음이 외부로 향해 산만해지는 한 기도나 하느님, 다른 어떤 것이든 참된 집중은 불가능하다. 감각과 운동신경을 활동시키는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마음이 자동적으로 정지시키는 때인 잠자는 상태에서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 소동이 정지되는 것을 경험한다. 요가명상의 과학은 감각의 침입으로부터 마음을 의식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생명 에너지를 제어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이것은 무의식적 망각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 세상의 거짓된 실체로부터 자신의 참 존재-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숭고한 영혼-과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지복 넘치는 전이이다. 영혼의 신성한 아들 신분이 방탕한 외부의식에 더 이상 낭비되지 않는 내향화된 침묵 은 하느님 아버지와 참된 기도와 신성한 친교를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하느님은 모든 기도를 듣는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항상 그분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모든 시대에 하느님과의 친교의 노력에 성공한 사람은 내면의 침묵 속으로 들어 간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대는 기도할 때 골방(마음을 침묵 속으로 철수시키는 것) 속에 들어가라. 그리고 그대의 문(감각의 문)을 닫았을 때 은밀히(내면의 초월적인 신성한 의식) 있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는 숨김없이 보상하리라(하느님의 항상 새로운 지복으로 축복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바는 사랑하고 즐기는 것이다. 가장 큰 죄인조차도 사악한 방법 배면에 감추어져 있는 동기는 행복으로 이끌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 행복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충동은 감각의 쾌락에 탐닉하는 충동에 빠져버린다. 그 감각적 강요가 사라지면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자동으로 나타난다.
감각신경을 통해 쏟아지는 감각은 마음을 무수한 생각 소음들로 가득 채우게 하여 마음의 모든 주의를 감각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느님의 음성은 침묵이다. 산란한 생각이 중지하면 직관적 침묵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표현 수단이다. 헌신자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침묵은 끝난다. 의식이 하느님과 내면으로 결합 된 헌신자에게는 하느님으로부터 귀로 들리는 음성이 불필요하다. 그래서 직관적 생각과 참된 비젼이 곧 하느님의 음성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감각 자극의 결과가 아니라 헌신자의 침묵과 하느님의 침묵적 음성이 합일된 결과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늘 자녀들과 함께 대화하고 계시다. 그러나 그분의 침묵의 음성은 자녀들의 생각의 소음에 압도되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주여, 당신은 항상 나를 사랑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듣지 못합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그분에게서 멀리 유랑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이다.

인간의 무관심과 감각 즐거움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은 존속하며 항상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감각에서 생각을 철수시키고 내면에 침묵해야 한다. 생각을 침묵시킨다는 의미는 생각이 신과 조율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된 기도가 시작될 때이다.
헌신자가 신과 조율될 때 신성한 음성을 들을 것이다.
“나는 여러 시대를 통해 그대를 사랑해 왔다. 지금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을 그대가 알든지 모르든지 나는 항상 그대를 사랑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말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
(마태: 6; 7-8)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함이라
8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닮지 말라. 이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심이라.
---------------------


헌신과 집중된 주의를 갖는 것은 기도를 효과적으로 만든다.


다정하고 진지하게 무수히 “나의 주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반복하면서 각 발언 속에 헌신자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더 깊이 성장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접촉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마음의 이면에는 휴가여행이나 호화로운 저녁 식사, 더 많은 돈을 벌 궁리로 차 있으면서 소리내거나 정신적으로 “주여! 주여!”하는 것은 “헛된 반복”일 뿐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무익하게 사용하는 것이다.하느님은 하느님 자신보다 다른 바램들이 헌신자의 가슴과 마음속에 우선한다는 것을 아는 한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교도”란 자신의 몸에 열중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의 의식은 “영과 진리” 속에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숭배하는 내향화 된 것이 아니라 감각 산만함의 “신들”과 교통하며 외부로 향해 있다.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생각 없이 하느님의 이름을 읊조리거나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소리 내는 단순한 육체적인 실행일뿐이다. 그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반복하도록 가르쳐진 앵무새의 자동적인 발성보다는 조금 낫다. 만약 한 청년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녹음된 음반을 가지고 사랑하는 애인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사용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너의 사랑을 확신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짓 같애. 그래서는 전혀 의미가 전달되지 않아.”
우리 숙모는 염주를 돌리면서 항상 기도를 염송하였다. 그녀가 어디를 가던 손에는 염주를 돌리고 있었다. 이 염주 돌리기를 40년이나 한 어느 날 그녀는 주님이 결코 응답 하지 않았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비록 그녀의 “기도”가 수백만 회에 달했을지라도 그녀의 주의는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가 신성한 친교의 참된 기술인 크리야 요가에 입문하게 되어 기뻤다.

모든 헌신자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생각을 아는 주님은 그 기도의 구성이 얼마나 세련될지라도 기계적인 앵무새 기도에 유혹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많은 기도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해하며 강렬하게 한가지 단순한 기도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 마음이 빠진 형식적인 기도는 작은 영성의 결과로 오는 경건한 느낌으로 자아를 만족시키는 위선을 낳는다. 생각 없고 느낌 없는 기도에 응답을 “요구하여” 신성한 중재를 기대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미신이다.

비록 하느님이 그런 수다스럽고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기도를 할 때 그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반응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진지하고 신앙심 깊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결심으로 기도하는 참 헌신자를 계속 외면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신약성경의 데살로니가 전서(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한다. 끊임없는 기도는 헛되고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증가하고 사려 깊고 진심 어린 헌신으로 영성화된 기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방랑했는지 관계없이 계속 주의의 고비를 꽉 쥐고 기도의 생각을 심화시키면서 마음을 신에게 끊임없이 유지하는 헌신자는 확실히 신성한 접촉에 도달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비슷하게 가르친다.
한번 또는 여러번 정신적이거나 구두로 정성을 다해 보낸 기도는 하느님에게서 확실한 응답을 가져온다. 헌신을 다해 “하느님!”을 부르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반복할 때마다 헌신과 집중을 늘리는 것은 기도가 하느님에게 도달했다는 확실한 증거인 황홀경과 기쁨과 신성한 평화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할 때까지 하느님의 현존의 대양 속으로 마음을 깊게 빠져들게 만든다.

헌신적인 기도는 모든 은혜의 무한한 원천에 인간의 삶을 필수적으로 연결하는 고리이며 하느님의 자유롭게 흐르는 축복의 통로를 여는 놀라운 수단이다. 그러나 마음이 외부로 방랑하면 기도가 효과적으로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 시간의 크리야 요가 명상이 보통 기도를 24시간 동안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크리야 요가 테크닉을 짧은 시간이라도 깊이 수행하고 나서 도달된 고요함 속에 명상자세 그대로 오래 앉아 있으면 기도의 힘이 두 배, 세배, 백배나 더 강력해 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면의 침묵의 사원 속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이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성전에 예배한다면 그분은 빨리 오신다.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시간은 의식이 몸 주변 환경과 몸의 감각 표면으로부터 철수하고 영혼지각의 뇌척수 축의 사원들(차크라) 속에 집중될 때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내재하는 본질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는 몸에 속박된 “이교도”의 탄원은 “헛된 것”으로 묘사하였다. 보통 사람은 인과의 제한된 법칙에 너무 얽혀 있어서 그 결과로 일어나는 카르마의 속박들을 깨트리기가 쉽지 않다. 하느님은 자신의 우주의 질서정연한 운행을 독단적으로 위반하지 않는다.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삶과 행동을 하느님의 법칙과 조화되도록 일해야 하며, 그로 인해 과거의 잘못을 중화시키기는 데 유리한 새로운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과 신앙, 명상으로 생긴 신성한 앎에 의해 유한성과 그 법칙들을 초월해 있는 무한한 아버지와 함께 자신의 의식을 합일시킨 헌신자는 즉시 하느님의 은총과 완화 시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영혼의 지위를 되찾는 것은 기도의 성취를 위한 주권적 방법이다. 필멸하는 거지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신성한 아들로서 주님에게 접근하는 헌신자는 아버지가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된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헌신자들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며, 매일의 생필품을 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청구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필요한 것을 줄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녀들이 무언가 구걸하는 거지로서 자기에게 접근하기를 원치 않는다. 거지 신세의 기도는 하느님의 무한한 왕국의 상속자로서의 신성한 장자권(長子權)에 대한 의심을 나타낸다. 거지는 거지의 몫을 얻지만, 아들은 아들의 몫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가까이 접근한 의식이다: 아버지는 항상 주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버지와의 불멸의 혈족 관계를 완전히 실현한 자녀들만이 그 상속권을 가질 수 있다.

---------------------

(마태 6; 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10 아버지 왕국이 임하옵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13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
같이 참고: (누가 11; 1-4)
1 주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셨는데 기도를 마치시니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께
말하기를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니
2 그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라.”고 하시니라.

-------------------
주 기도문의 영적인 해석

예수는 하느님이 모든 존재의 천상의 아버지임을 상기시키고, 자녀들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회귀하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그가 가르친 효과적인 기도 방법은 자신 없는 망설임을 버리고 자애로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처럼 즐거운 기대감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향해 주님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느끼며 심지어 가장 달콤한 인간 부모의 염려를 넘어 선다. 예수의 가르침의 함축된 의미는-각각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아버지인-“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영적인 사람이나 세속적인 사람들 모두에게 기도의 기준을 주었다: 즉, 신앙심 깊은 헌신자는 하느님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만 그분의 사랑과 영적인 진보를 원한다. 물질적 마음을 가진 사람은 소량의 영적 성취를 포함하여 세속적 삶에서의 모든 국면의 성공과 복지를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구한다. “주 기도문”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육체적 필요, 정신적 필요, 영혼의 필요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말의 영적 심오함과 단순한 웅변은 나에게 다음 같은 해석적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너희가 기도할 때 마음의 완전한 주의력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을 부르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대로 말하여라:
“우리 아버지 우주의식이여! 당신은 모든 만물의 의식의 원천이며, 천상의 지복의 진동 없는 영역에 존재하며, 천상의 직관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도 영광되게 하소서. 세상의 발현들 속으로 당신에게서 발산되는 우주적 진동들과 당신의 성스러운 이름이 우리에게 물질의식이 아니라 우주의식을 양육하도록 우리를 신성하게 해주소서. 당신의 절대적인 대왕 의식이 인간의식 속에 나타나게 하소서, 당신의 영적 왕국이 와서 세상의식의 물질왕국을 대체하소서. 천국의 에스트랄 영역에 있는 해방된 영혼들과 천사들이 당신의 의지를 따랐던 것처럼 당신의 지혜로 인도된 의지가 세상의 망상에 빠진 사람들을 인도하는 힘이 되어 주소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자양분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만나(신의 음식)와 매일의 음식을 우리에게 주소서: 몸을 위해서는 번영과 건강과 음식을 주시고, 마음을 위해서는 효율성과 능력을 주시고, 영혼을 위해서는 사랑과 지혜, 지복을 주소서.”
“오, 주여,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가르쳐 주소서, 우리가 채무를 잊어먹는 빚진 형제를 용서한 것처럼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들의 건강과 생명, 영혼, 모든 것을 우리는 당신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며, 당신에게 빚진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의 제한된 영적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라 해도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지 마소서, 우리가 당신이 준 이성을 오용하여 유혹의 구덩이에 빠졌다 해도 그곳에 우리를 두지 마소서,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더 강해지도록 시험하는 당신의 뜻이라면, 아버지! 그때는 당신이 세속적 유혹보다 더 큰 유혹이 되소서, 우리의 개인적인 노력과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영적 힘을 통하여 모든 고통을 만드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물리적 힘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당신의 왕국의 능력과 영광으로 통치되는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소서. 우리는 성스러운 우주적 진동인 옴, 아멘을 통해 당신에게 접촉함으로써 당신에게 절합니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신성한 진동으로부터 왔다고는 하지만 그들 가운데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사악함 때문에 이 세상이 아직 하느님의 이름, 또는 순수한 성스러운 진동에 의해 신성하게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지혜는 초월적인 우주의식의 유일한 왕 같은 힘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소서”라는 말 속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절대적 힘이 망상에 빠진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날 수 있음을 기도하고 있다. 예수는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한다: 즉, 하늘의 영역에 있는 천사들과 신성한 영혼들이 하느님의 뜻의 지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도 망상에 속박된 자아의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인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음식(빵)을 주옵소서.”: 전능한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음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대중들은 가난하였으며 대체로 먹을 것이 부족하였다. 예수는 대중들이 세속적인 관심사를 다루지 않는 영적인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굶주린 사람이 영적인 실현을 위해 노력하기에는 그 동기가 부족하다.

예수는 물질적인 음식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영혼을 위한 모든 국면을 포함하는 음식(자양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는 말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사람은 물질적 수단으로만 살 수 없다. 사람은 존재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창조적인 우주의 진동(“말씀‘)과 자신의 의식을 지탱하는 편재하는 그리스도 의식의 타고난 지혜와 지복에서 흐르는 생명력에 의존해 있다. 이 신성한 생명력과 지혜와 더욱더 조율될수록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들의 성취를 더 끌어 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첫 번째 기도는 영혼을 먹이는 하느님의 지복, 지혜, 사랑과 접촉하는 영적인 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다음 훌륭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마음의 능률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물질적 번영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기제어, 유혹의 지배, 망상의 극복을 위한 기도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이 말에서 예수는 사람이 유혹의 괴로움에 빠진 것이 마치 하느님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곤경에 빠트린 듯이, 그것이 거의 하느님의 책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어느 정도 그것은 사실이다. 하느님이 망상(마야)의 창조자이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유혹자이다. 하지만 지혜가 있는 하느님이 단지 반응을 시험하기 위해 지혜를 갖추지 못한 필멸하는 인간들을 유혹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하느님은 해칠 수도 있는 잔인한 유혹의 세상으로 인간들을 유혹하는 친근한 장난꾸러기가 아니다. 선과 악은 하느님의 우주적 영상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명암대조를 이루는 빛과 그림자이다. 선의 흰색의 순수함은 악의 어두운 배경 위에서 그 미덕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발달시키기 위해 마야 망상의 이 이중성으로 시험받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 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탄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의 유혹의 게임에서 벗어 날 수 있다.

하느님은 사탄의 유혹의 영향력을 쉽게 취소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효화하여 꼭두각시로 만들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의 드라마의 계략은 자녀들이 어떠한 강요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써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우주적 연극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느님 자신을 선택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인간 반사들이 타고난 신성의 불변하는 기억으로 이 우주적 영화관의 장대한 드라마를 즐기기를 바란다. 시련과 유혹은 영혼의 숨겨진 하느님과의 동일성을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끄집어내어 발현하도록 변덕스러운 인간들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 시련과 유혹을 극복하여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것은 그 신성한 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님은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유혹의 힘을 정복하고 내면에 있는 영의 힘을 발휘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한 것은 사람의 불행의 어떤 부분의 책임이 신에게 있는 듯이 책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망상을 극복하기 위해 신에게 도움을 간청해야 할 필요성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준 이성을 잘못 사용하여 유혹의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오, 주님 우리를 그 구덩이에서 구조해 주소서.”
하느님이 주신 자유선택의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지 않으면 악의 심연 속으로 빠지게 된다. 사탄은 우주적 망상으로 부주의함의 덫을 놓고 무지로 이성과 의지를 파멸시킨다. 그러한 방법으로 사탄은 하느님을 성공적으로 차단한다. 그래서 예수는 천상의 아버지가 우주적 망상의 사악한 매혹에서 모든 영혼을 구원해 주기를 기도하였다.

성령은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그러나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밤 잠자면서 육체 의식을 버리고 신이 된다. 그리고 매일 낮에는 악마가 되기를 선택한다. 아버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필멸의 육체 의식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신성을 기억하고 그 필멸하는 약점들은 조금도 우리의 영혼 탓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도의 경전들에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침에 깨어나면 의식에 영감을 가진다: “나는 방금 영에서 나왔다. 나는 지금 영이다. 나는 항상 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두통이 있을 때 빠르게 자신의 숭고함을 잊어버리고 진짜로 필사자(必死者)라고 느낀다. 항상 자신의 참 진아(眞我)를 기억한다면 다시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사실이다. 계속 확언을 반복하고 현자들과 교제하고, 경전을 공부하며, 특히 필멸하는 제한된 의식적 꿈이 영혼의 초의식의 지각 속에 완전히 용해되도록 명상하고 인내하는 헌신자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성한 친교는 인간을 원래의 진아로 회복시킨다. 그는 자신의 영혼의 완전한 선(善) 속에서 완전한 만족을 느끼고, 감각의 유혹적 제공물을 갈망하던 욕구와 번뇌들이 고귀한 신성한 기쁨으로 대체되었음을 깨닫는다.
자제력은 유혹의 지배자이다. 인간이 덜 진화된 생물처럼 행동할 때 경멸받는다. 짐승조차도 본능적으로 인도되어 더 현명하게 행동하려 한다. 짐승은 사람과 교제할 때만 부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배운다. 짐승의 행동은 식별력 있는 자유의지의 동기가 없기 때문에 그들 속에는 악이 없다. 인간은 옳고 그름, 유익과 해로움 간에 선택을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속박된다. 자제력을 발달시키지 않는 한 유혹될 때 더 나은 판단을 하지 못하고 불별 없이 행동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해로운 방종의 유혹의 불길 속에 불타고 난 후에야 자제력을 배운다. 영적 가르침에 복종하고, 현명한 식별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학습을 피하는 것이 더 낫다. 분별 있는 자제력이 없다면 미덕의 세련된 아름다움은 감각의 화려한 금박으로 인해 빛을 잃는다.

유혹에 처한 사람은 유쾌한 상태가 아니다. 유혹으로 인해 사람은 악의 최면시키는 마력에 빠져 많은 장애 속으로 즐겁게 이끌린다. 즐거움이 없다면 악에 빠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성도착자, 무분별한 과식자 등은 습관에 빠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자신과 행복을 서서히 죽이는 댓가를 치른다.

유혹은 어떤 유혹적인 것으로 감각에 심한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해롭다. 일시적인 즐거움을 바라는 욕망 때문에 미래의 병드는 결과를 무시한다.
위조된 동전은 가치는 없지만 진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비슷하게 매력적이지만 무가치한 악에서 비롯된 줄거움과 가치 있는 선에서 오는 참 행복의 차이를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기도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돕기 때문에 미망의 혼동스러운 결과를 약화시키고 선과 악 간의 그릇된 선택을 방지한다. 성자들은 참 행복을 가져오는 영혼 특성의 표현과 신과의 교통을 단절시키는 것은 얼마나 좋게 보일지라도, 어떤 것이든 악으로 정의한다.

신과 교통하는 기쁨은 한 번 맛보고 나면 세상의 모든 유혹보다도 더 유혹적이다. 그 참 기쁨으로 유혹받는다면 감각의 유혹은 시들게 된다. 나는 항상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태초부터 당신을 드러내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우리가 해로운 행동을 하면서 즐거움을 찾느라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요!” 신은 최고의 매력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여 비교하지 못했을 때만 악한 유혹은 힘을 갖는다. 신선한 치즈가 있는데 섞은 치즈를 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기쁨보다 괴로움을 더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망상 때문에 유혹에 빠진다. 범죄자는 돈을 훔쳐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범죄가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슷하게 감각의 유혹 또한 행복을 지불 하지 않는다.

감각적 지각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육체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행복과 복지의 잔인한 약탈자는 식별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지각에서 솟아나는 감각적 행동들이다. 청각, 후각, 시각은 보통 약간의 나쁜 영향으로 인해 혹사 될 수 있다. 일부 사람은 실명 지점까지 눈을 혹사하는 바보 같은 우를 범한다. 아무도 죽음을 초래할 만큼 오랫동안 꽃 냄새나 향기를 맡지 않는다. 과도한 볼륨의 소리가 아니라면 좋은 음악을 계속 듣는다고 해서 귀머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각은 잘못된 판단과 불행을 초래하는 매력으로 인해 미끼가 될 수 있다. 청각은 아첨하는 달콤한 말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격심한 진동을 수용함으로써 의지를 약화시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후각은 보복 없이 많은 악용(남용)에 견딜 수 있지만 기억을 자극하고 충동과 성적 흥분의 습관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미각이나 촉각이 과도하게 지나칠 때 무서운 결과가 따른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과식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질병과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쁜 건강, 물림, 사회적인 배신, 결혼생활에 재앙 같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감각적 욕망에 노예화되고 분별없이 유혹에 굴복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느님은 인간을 참 영혼 성품으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무한적인 업악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절제와 미혼 생활에서의 금욕과 자기제어, 그리고 명상 속에서 신과의 즐거운 접촉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호흡과 생각이 고요해지는 명상 속에서 신의 기쁨이 느껴지고,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때 육체적 유혹은 이 더 높은 신성한 지복의 의식과 대비되어 자연스럽게 정복된다.

그러므로 헌신자가 신에게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옳다: “당신의 우주적 마야의 유혹들을 나의 나약한 충동 앞에 두지 마소서.” 미망의 감각적 유혹은 씨와 같고 나약한 정신적 충동은 그들이 좋아하는 밭과 같다. 유혹의 씨앗들이 비옥한 마음의 토양에 뿌려지면 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싹들이 유일한 실재로서의 신을 실현한 지혜에 의해 말라 버린다면 잠재된 물질적 욕망들은 그 강제적인 힘을 잃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이성을 가리고 흥미를 끄는 매력에 둘러싸여 있다. 뇌세포의 홈 속에 저장되어있는 과거의 습관과 모든 욕망이 완전히 소각될 때까지는 나약한 순간이 오면 잘못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습관과 충동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습관과 충동에 복종할 때 자유의지와 올바른 판단을 잃게 된다. 그러한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

사람은 강제적 충동에서 자유로울 때까지는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잠복된 성향을 일깨우면서 주변의 즉각적인 환경의 리모콘 같은 영향력에 따라 움직이며 회사를 오고 가는 로봇과 같이 행동한다. 물론 자신의 자유선택에 따라 좋은 행동을 하거나 나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행동과 습관은 출생 전에 잠복된 원인이나 출생 후의 감추어져 있던 행동의 결과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힌두교 경전에서는 과거 생에서나 이생에서 형성된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잘못들로 초래된 결과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고 가르친다. 좋거나 나쁜 행동의 결과는 잠재의식 마음과 초의식 마음에 저장되어있으며, 이 ‘씨앗 성향들’(samskaras=잠재인상)은 특정한 적절한 기회가 올 때 발아하고 성장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주적 망상을 만든 창조주에게 이렇게 요청해야 한다: “주여! 우리의 카르마적 충동이 세상의 악의 유혹들과 일치하여 발아할 수 있는 장소와 조건으로 인도하지 마소서! 당신과 접촉하는 기쁜 경험으로 인도하소서!” 태양이 뜨면 빛을 잃는 촛불처럼 반딧불 같은 감각적 즐거움의 깜빡임은 황홀경의 들불(큰불) 앞에서는 소멸한다. “오, 주여! 우리가 감각적 유혹의 빛의 접근으로 봉사가 되지 않게 하시어 당신의 신성한 광채가 전 우주에 고요히 퍼지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비록 신이 창조를 위해 마야의 상대성을 허용할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거나 신의 현존의 더 좋은 유혹을 선택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우리 각자는 서로 승리하기 위해 싸우는 이성과 감각충동 간의 개인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어리석게도 유혹의 힘에 굴복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왕국에 대한 주권을 잃는 것이다. 성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은 죄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더 큰 기쁨으로 스스로를 유혹하기를 지속하면서 세상의 유혹을 거부하였다. “주여! 저는 당신과 세상의 유혹을 계량해 보고 세상의 유혹보다 당신이 더 유혹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세상의 유혹보다 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가슴 속에서 확신하여야 한다. 혹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유혹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심한 자기제어의 그러면 신을 발견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객관적인 방법 외에는 신과 선의 자기적 끌림에 저항하는 사탄의 맹렬한 저항을 보지 못 한다. 악마는 해방에 거의 도달한 위대한 성자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의식적 힘은 일반인이나 수행과정에 있는 헌신자를 잡기 위해서는 그러한 연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은 작은 미묘한 유

모든 선과 미덕에 대해 사탄은 반작용하는 똑같은 저장소(척력)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은 용서를 창조했고, 사탄은 복수를 창조했다. 하느님은 고요, 용기, 이타심, 형제애, 평화, 사랑, 이해심, 지혜, 행복을 창조하였고, 이들 각자에 대항하여 사탄은 불안, 공포, 탐욕,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이기심, 전쟁, 증오, 분노, 복수, 이해를 대신하여 질투심을, 지혜를 대신하여 무지를, 행복을 파괴하는 슬픔을 창조하였다. 신의 음성인 양심은 사람들에게 항상 옳은 일을 하라고 손짓한다. 사탄의 음성인 유혹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구슬린다.

이 악의 무리의 존재로 인해 예수께서 “하느님의 왕국이 임하옵고”라고 기도한 이유는 사람이 독립성(자주성)을 사용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때 악마의 무질서가 하느님의 왕국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의 세속적인 불완전성과 사악한 설계를 파기하는 하느님의 모범적인 영향을 따르는 완전한 삶을 삶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천국을 만드는 것을 돕는다. 사탄의 능력은 일시적이지만 하느님의 통치, 즉 하느님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은 영원하다.

----------------

(마태 6;14-15)
14 만일 너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니라.
15 그러나 만일 너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니라.
-----------------
신성한 아버지는 자신의 우주의 드라마 속의 모든 나쁜 행위자들을 참을성 있게 용서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행동을 통해 그들이 축복받게 한다. 사람이 자신의 더 높은 진아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할 때 그는 가슴 속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해로운 부식성의 느낌들을 정화 시킨다.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해도, 올바른 방법과 시간에 악에 비협조적이거나 의무적으로 저항할지라도 보복하고자 하는 감정은 갖지 말아야 한다. 악을 방지하거나 막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복수하려는 동기로 해서는 안된다. 악한 세력과 원수를 처벌하는 것은 신성한 법칙에 할당된 기능이다.

누군가에게 칭찬과 친절을 받으면 미소지으며 따뜻하게 반응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 특성이 시험받을 때 상처를 받게 된다. 그것이 용서를 실천할 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오, 아뇨, 당신이 날 모욕하는 것은 상관 안 해요.”라고 하지만 마음 안쪽에서는 복수심이 끊어 오른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다. 짓밟히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면을 제어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 속에 신이 있음을 아는 것, 미망에 사로잡힌 잘못된 행위를 하는 자들을 신이 하듯이 용서하는 것, 비록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하느님이 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 마스터(지배자, 달인)가 되는 길이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해를 받더라도 용서해야 한다. 인간이 서로 용서하기 때문에 그 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용서는 성스러움이다. 용서로 인해 우주는 서로를 돕는다. 용서는 용사의 힘이다. 용서는 희생이다. 용서는 마음의 고요함이다. 용서와 온화함은 진아를 깨달은 자의 특성이다. 용서는 영원한 미덕을 표현한다.”

-------------------

(마태 6;16-18)
16. 또 너희가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것을 보이려고 그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은 것이니라.
17 그러나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그리하여 네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한 곳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만 보이게 하라. 은밀한 곳에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
고통과 속죄 : 영성에 대한 왜곡된 개념

단식은 신의 영을 받기 위해 고집 센 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금욕(고행)의 한 형태로 신에게 접근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고대부터 모든 종교의 헌신자들이 실행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식이나 다른 고행의 수행이 신에게 더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견딜 수 있는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하는 위선에 대해 지적하였다. 초월성의 선행조건이 되기 위해 고통을 상상하고, 고양의 증거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속죄하는 그들은 실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중의 눈에는 상승을 촉진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한 영성에 대한 왜곡된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긴” 인생이 요구된다고 믿으면서 신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이는 사실과 무관하다! 신을 아는 것은 기쁨을 아는 것이다. 진실한 헌신자는 절대 우울하거나 침울하지 않다. 그들은 기분 좋고 기쁜 것이 신을 기쁘게 하는 것임을 안다. 행복이 커질수록 그의 신성한 조율이 더 커진다.
“그들의 생각이 나에게 몰입되어 있고, 그들의 존재를 나에게 양도하며,
서로를 계몽하며, 항상 나를 선언하는 헌신자는 만족하고 기쁨에 넘친다.”

나의 스승님이신 스와미 스리 유크테스와르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같이 “슬픈 표정”을 나타내는 제자들을 혼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종종 말하였다:
“주님을 찾는다고 얼굴을 찡그릴 필요는 없다.
신을 찾는 것은 모든 슬픔의 장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

(마태 6;19-21)
19. 너희 자신을 위하여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치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도둑질하느니라.
20. 오히려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치지 않으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
너희 자신을 위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

부패하기 쉬운 물질적 번영이나 육체적 건강을 축척 하는 데는 모든 노력과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영원한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돈, 명성, 감각적 즐거움, 물질적 사치품 같은 것들은 자연의 부패와 불운한 카르마(업), 또는 죽음의 막을 수 없는 도둑에 의해 결국 빼앗길 것이다. 인간이 무덤의 입구를 지날 때 가장 귀중하다고 여기던 보물도 잃을 것이며, 천상의 영광에 머물지 못할 때 슬픔만이 그를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미완성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이 필멸하는 세상으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생각하고 계획 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한가지 욕구가 만족 될 때 그는 다른 것을 뒤쫓기 시작한다. 앞쪽의 장대에 소시지가 매달려있는 손수레에 묶여있는 개처럼 그는 갈망의 노예가 되어 갈수록 늘어나는 인생의 짐을 짊어지면서 늘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물건이나 저 물건을 얻을 때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올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헌신적으로 움켜쥐고, 다른 모든 욕망을 순종케 하여 그것을 강화시키고 활기차게 해야 한다. 예수는 세상적인 부패나 도둑이 훔칠 수 없는 하느님의 불멸하는 번영을 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여기와 내세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영성 속에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덕을 베풀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권한 그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이생에서 전 세계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지만 신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는 행복도 평화도 진정한 가치가 없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다음 생으로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명상하는 극도의 노력으로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은 물질적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 세상의 눈에는 가난할지라도 영원한 보물을 지닌 부자이다. 지상에서의 짧은 삶이 끝날 때 그는 끝없는 지복의 불멸하는 하느님의 보물과 함께 떠날 것이며, 그것을 영원히 즐길 것이다.

--------------------

(마태복음 6;22-23)
22. 눈은 몸의 빛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하나가 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요.
23. 만인 네 눈이 악하면 네 온몸도 어두워질 것이니라.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같이 참고할 것: (누가복음 11;33-36)

33. “아무도 촛불을 켜서 은밀한 곳이나 곡식되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사람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는 것이라.
34. 몸의 등불은 눈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하나가 되면 네 온몸도 빛으로
가득 차나 네 눈이 악하면 너의 몸도 어두움으로 가득하리라.
35.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36. 만일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차서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그 등불의 밝음이 너를 비출 때처럼 전체가 빛으로 가득 하리라.”고 하시더라.

------------------

“하나의 눈”을 통하여 인간의 몸과 우주는 신의 빛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인다.

몸속의 신을 드러내는 빛은 깊은 명상 속에서 보이는 이마 한가운데 있는 외눈이며, 이것은 신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헌신자가 이 영안(靈眼)을 통해 지각할 수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전신은 물론 우주 진동에서 발산되는 신의 빛으로 가득 찬 자신의 우주적 몸도 보게 된다.

내향화된 명상의 집중 속에 눈썹 사이(미간) 지점에 두 눈의 시야를 고정하면 좌우 눈의 음양의 시각에너지를 집중시켜 신성한 빛의 외눈으로 그 전류를 통합할 수 있다. 무지하고 물질적인 사람은 이 빛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명상을 실천한 사람은 누구나 그 빛을 가끔 볼 수 있을 것이다. 헌신자가 더욱더 진보하면 그는 밤이나 낮에도 눈을 감거나 뜬 채 마음대로 이 빛을 보게 된다. 고도로 진보된 헌신자는 원하는 만큼 이 빛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의식이 이 빛을 관통하여 나갈 수 있을 때 초월적 실현의 가장 높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시선과 마음이 신에게서 벗어나 악한 동기와 물질적 행동에 집중될 때 그의 삶은 망상의 무지, 영적인 무관심, 고통을 만드는 나쁜 습관의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내부우주의 빛과 지혜는 숨겨져 있다. 인생의 행로에 망상이 제공하는 무엇이나 좋거나 나쁜 것으로 수용하면서 신성한 실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조그만 아는 유물론적 사람에게 “그 어둠은 얼마나 큰가!” 그러한 축축한 무지 속에서 사는 것은 육화된 영혼의식을 위한 타당한 삶이 아니다.
영성화된 사람(몸과 정신의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에스트랄 빛과 지혜로 내적으로 계몽되어, 전 우주들을 신의 지혜의 빛과 지복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진아실현의 빛이 온전히 드라나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신성한 지혜의 끝없는 인도를 받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