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비실재성에 대한 이해 / 파라마한사 (1926년 연설문)
힌두 경전은 물질의 비존재에 대한 믿음과
영혼만의 실재는 교단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 불가능 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 아니며,
과학적, 정신적 고찰과 정확한 이해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을
음식물로써 지탱되는 육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이 존재하는 원천이
프라나(생명 에너지)임을 깨달을 수 없다.
우주적인 힘이 미치지 않는
인간에게는 음식물이나 다른 외부의
어떤 도움도그를 소생시킬 수 없다.
인간의 물질적인 육체와
그의 비물질적인 정신을 결속시키는 것은
프라나 이다.
고대 인도의 성자들은
프라나를 발견하여 생명 에너지를 통제하는
프라나야마 학문을 체계화 시켰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했다.
그는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라고 했다.
그 말씀이란 우주적 진동이다.
신의 입은 두뇌의 후부에 있는 연수이며,
이는 척수를 향해 점점 가늘어져 없어지게 된다.
인간의 육체에 가장 활력이 있는 부분인 이곳은
“말씀”이나 “옴(AUM)을 향한 성스러운 입구(신의 입)이며
인간은그 우주의 진동하는 에너지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금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그리스도가 40일 동안 했을 때
신의 “말씀”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없다.
일주일의 초반기
금식상태에서는 배고픈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고 나면, 점점 배고픈 것이 덜하게 되고
분명히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신체에 대한 모든 음식물을 거절한다는 것은
몸이 생명의 흐름인 비물질적인 음식물에
의존되도록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의 의지력은, 에너지의 위대한 원동력이다.
의지력과 자발적인 의도를 통해 인간은 빠르게
내적 힘의 무한한 저장물을 끌어 낼 수 있다.
사람이 마지못해 자신의 하루일과를 수행하게 되면
에너지의 부족을 느낀다.
그러나 기꺼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우주적인 힘에 의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탱되어 나간다.
의지력을 사용하거나 생명력의 불변의 원천을
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삶의 형이상학적 방법을 배우거나
수련하는 사람은 육체의 많은 한계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힌두교의 성자와 요기들은
물질이란 정신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예수와 같이 그들의 육체와
다른 물리적 사물들을, 물현화 시킬 수 있는 힘과
그것을 다시 비물질화 시킬 수 있는,
힘을 보임으로서 이러한 진리를 입증했다.
물질의 화학적 원소는 전자의 진동이다
현대 과학은
물질이 진동하는 힘으로 구성되어 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형태를 이루는 화학 원소와
구조적 인자(因子)들 {돌과 별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은
단지 전자의 진동 형태가
서로 다른 것에 불과 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얼음을 보고
찬 것과 무게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확실 하다.
얼음을 녹여 보라. 물이 된다.
다시 전기를 보내라.
보이지 않는 수소와 산소로 되는데
이것은 더 나아가 전자의 진동으로 분석되어 진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 촉각 등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얼음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얼음의 본질은 에너지의 형태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분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존재한다고만 볼 수 없다.
이런 의미로서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은 상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물질은 우리의 정신에 연관되어 존재하며
불변성과 불멸로서,
보이지 않는 전자적 힘의 표현으로서 존재한다.
물과 얼음은, 둘 다 보이지 않는 기체의 생성물이다.
이것은 단지 외관적, 일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한적인 정신과 물질은
신성한 의식의 표시 무로서 지나치는 것이며,
단지 외관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고,
실제로는 오직 우주적 정신만이 존재 하는 것이다.
한 어린이가 부모라는 매체를 통해 태어나는 것과 같이...
물질은 그의 존재를 위한 정신에 의존하는 것이다.
물질은 신성한 정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고
유한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즉 본질적으로,
물질은 실재성이 없으며
고유의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조의 맹목적 또는 비지성적인 전자적인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론적 대행자이다.
왜냐하면 그들 내부에는 신으로부터 발행된
스스로 의식하는 생명력 또는 프라나,
우주적 진동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께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그것도 전자와 생명 전류가 앞으로 흐를 수 있도록
빛이나 진동하는 에너지가 된
신의 사고와
의지의 계획인 것이다.
그것은 더욱더 강하게 진동하여
여러가지의 미묘하고도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이 되었으며, 차례로 이 우주를 형성하는
92가지의 주요한 원소들로서 그 자신을 구체화 시켰다.
인간의 의식으로는 물질이란
감지할 수 있거나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론적 조사와 논리 또는 어떤 실험을 통해
(여기서 실험이란 보이는 얼음 덩어리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원하고 불변한 창조적 힘이
일시적이고 환상적인 모든 현상계의 형태 속에
그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해 왔다.
이런 진리는 파도가 하나의 커다란
물질의 외관적 표상으로서 단지 스쳐지나가는
일시적 존재를 나타낼 뿐일지라도 대양(大洋)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해되어 질 수 있다.
파도는 대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대양은 파도와 더불어, 또는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지적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지만
인간은 예수나 크리슈나, 그리고
다른 자아실현 완성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물질을 생명력으로 바꾸고
생명력을 우주 의식으로 바꾸는 방법을
배워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주는 신의 꿈이다
베단타와 요가에서는...
우주는 신의 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물질과 정신, 즉 별 행성들로서 이루어진 우주
그 모든 표면이 파동치고 물질적인 창조물에 깔린 미묘한 흐름,
감정, 의지, 의식에 대한 인간의 힘,
생과 사, 낮과 밤,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의 상태...등등
이 모든 것들은 신의
이 꿈을 지배하는
상대성의 법칙에 따라
실제적인 것들이다.
상대적 원리로서 알 수 있는
그 모든 이중성은
위대한 우주적 꿈을 꾸지 않는 유한적인 인간에게 실제적이다.
마야, 환상, 상대성 원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영원한 신의 세계를 향해 그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합법적인 꿈을 상상으로써,
그러한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오직 죽음을 부정하고
생을 긍정함으로써, 질병을 무시하고
건강을 인정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의 상태란 헝겊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그 반대의 상태와 똑같이 존재한다.
이중성은 선천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이 진리를 찾는 이는
그의 마음속으로 그들을 분리하려 하지 않고
지혜로써 그들 위로 상승하려 한다.
인간의 육체가 정신과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본질에 있어서 불변적으로 우주의 이원성에 대해
오직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유익한 양상을
실재로서 수긍하기를 원하는 인간은
이 지상의 환상 속에 잠자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실제로 보이는 꿈을 꾸지만
그의 의식 상태에서 깨어나게 될 때
무가치한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는 물질이 실재한다는 꿈으로부터
불변의 정신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식을 무한으로 확장, 변화시키는 것을 배운 초능력자는
천지창조가 신의 꿈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과학적인 요가수련 또는
영적 완성을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
자아실현 훈련단계의 수단으로
신을 찾는 탐구자는 이중성의 비밀을 풀고
영적 합일을 분간한다.
“미혹의 세계로부터 해방된 자는
내가 전능함을 얻은 최상의 영혼임을 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숭배한다.” (바가바드 기타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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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shambala/FxA7/477
출처: 요가난다 명상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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