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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한사 요가난다/ SRF 국제 본부에서의 연설문(193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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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의 무한한 본질
힌두경전에서 신은 인간의 의지와 지능의 영역에서 벗어난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위력적이지만 그들의 설명은 신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기만 하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은 신의 진실 된 개념을 간파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여러분이 하늘에 수백만 킬로 떨어져 있는 해를 바라보면 그 거대한 발광체는 우리가 사는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인다
그러나 지구의 직경은 약 13,896km이고
태양은 그것의 100배 이상이나 된다.
여러분이 지구를 태양 옆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면
지구는 조그만 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태양의 구(球)가 점점 커져서
그 크기로 하늘의 푸른 공간에
꽉 메워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채워진 공간은 역시 셀 수 없는 무한대의 것으로 펼쳐지는 공간의 한 분자이며, 또는 한 작은 알맹이인 것이다.
태양이 우주 공간에서 끝없이 확장하게 된다면 무한성에 관한 그 측정을 할 수 없게 된다.
한계에 대한 우주적 망상은 그러한 광대함을 정신으로 하여금 생각지 못하게 한다.
그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언제부터 이 끝없는 허공이 있었는가? 기원도 알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는 것이 신이다.
이 우주공간의 가장 먼 곳에까지 무소부재하며 멀리 있는 별이나 여러분과 내 안에서도, 즉 신은 그가 거처하는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은 정신이 아니고 정신을 만든 이며, 그 너머에 살아 존재하신다. 한편 우리는 그를 우리의 마음속 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를 정확하게 신성한 의식, 신성한 기쁨, 신성한 존재라고 부를 수 있으나 정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정신은 신의 무소부재를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신을 느낄 수는 있다.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과 측정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경향들이다.
파도는 대양을 측정할 수는 없으나 그들 사이에는 뚜렷하게 관계되는 점이 있다.
따라서 무한한 것이 유한해지는 곳에는 초의식의 정신과 같은 연결점이 있는 것이다.
그 정신은 신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평상시의 정신을 초의식의 정신 상태까지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확장시킨다면 그때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한세계에서 유한세계로 내려왔다.
우리는 무한 세계로부터 유한세계로 내려왔다. 요가는 내부에 있는 진리의 원천에 주위를 모으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신이 그의 의식을 다수의 형태로
그의 창조물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만드는데 어떻게 응축시키는지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육신은 신의 창조물 중에 가장 복잡한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기원적인 세포는 분리된다. 즉 우리의 성스러운 영혼 의식이 거처할 육체의 성전을 만들기 위해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그 주위에 100만의 세제곱 되는 수의 세포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1g의 인간의 살 속에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잠겨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에너지가 방출되면 공간 속으로 무수한 전자들이 멀리 퍼져나가게 된다.
육체 속에 존재하는 의식의 힘과 영역에는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외적으로 우리의 몸은 살로 만들어졌지만 모든 세포들 속에는 생명의 흐름인 전류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미묘한 에너지 속에는 사고와 감지능력이 있는 것이다.
사고는 지칠 줄 모른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상상하기 힘들 만큼 많은 수의 사고들이 에테르를 통해 지나갔다.
인간은 그들을 셀 수 없으며 단지 여러분이 자신의 일생동안 표현한 사고와 느낌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 회고한다면 그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될 수는 있다.
수백만의 것들! 단지 1년 동안의 것, 아니면 단 하루라도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해 보라. 선사시대로부터 모든 인간의 사고들에 관한 축적물에 관해 상상해 보자.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정신은 자연의 신비한 현상조차도 측정할 수 없다. 이 예배당에 있는 전깃불 속으로 흐르는 전류에 돌고 있는 전자는 얼마나 되는가?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이 전깃 불은 1조나 되는 수의 전자가 함께 춤을 추면서 빛을 발한다.
이러한 극미한 입자들이 수초만에 여기서 뉴욕까지 또는 지구상의 어느 곳까지 갈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과학적 실험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얼마나 되는 양자나 전자가 이지구상에 응축되어 있는지를 계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정신은 매우 멀리까지 가겠지만 곧 멈추게 된다.
찾고 있는 마음에 나타난 것은 유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 미묘해서 생각이 따라갈 수 없게 되는 곳 너머에 중대한 사실이 있다.
정신이 관통할 수 없는 곳으로 부터 신은 유한한 창조물을 만드는 우주적 지혜의 진동을 가진 그의 본질적인 빛을 부어 내린다.
신의 본질은 직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가 적절하게 정신을 사용하면 마음과 지능의 저편에서 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고 영혼의 직관력을 그의 참다운 본질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정신과 지능의 핵이라는 초의식의 정신을 통해 신의 의식을 발견해야 한다. 그의 무한한 본질은 영혼의 직관적인 초의식 상태를 통해 인간에게 드러난다.
명상 속에서 느껴지는 기쁨은 모든 창조물에 번져가는 영원한 기쁨의 존재성을 나타낸다.
명상 중에 보이는 빛은 우리의 사실적인 창조물을 만든 에스트랄 빛이다.
이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모든 것들과의 결합체임을 느끼게 된다.
보통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서는 비교적 '무지하다. 그러한 한정된 감지력의 생활'은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내 음성에 이끌려 온 염소를 보곤 했다. 어느 날 내가 예배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을 때 그 염소가 총총걸음으로 들어와서 통로를 따라 바로 내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내 목소리를 좋아하는 것이지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말하는 것을 알아듣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순한 언어 너머에 있는 신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 이 예배 당에 와 있다. 여러분이 신의 의식과 여러분의 의식을 조화 시키거나 축복의 흐름 속에서 거하게 된다면
신과 합일된 곳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부에 있는 신의 의식에 조화를 이룸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이는 여러분 역시 성취할수 있는것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성장하거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친족애를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책임감은 커지게 된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고통을 감수했다.
우리들 역시 추위와 질병에 무서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악몽이다.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괴로움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역시 신으로 부터 그들을 제거해 낼 것이다.
신은 그의 자식들이 불행에 처해있을 때는 즐겁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도 자신의 자녀들 속에서 괴로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여러분 대부분은 아름다움과 평화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오늘 루이즈빌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수천의 사람들이 홍수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오래전에 한번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그 넓은 땅에 어떠한 재앙도 없는 놀라운 곳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신은 내게 지금 일어난 홍수를 보여 주었다.
스페인 전쟁에서 죽은 수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과 사고의 진동은 세상에 있는 이 홍수와 다른 재앙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대기적 변화를 야기시켰다. 전쟁은 “자연”의 재앙을 일으키면서 균형과 조화로부터 모든 자연을 내던져버리는 그릇된 진동을 내뿜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고, 인간은 그 자유를 오용해 왔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된다. 신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자유를 오용하는 것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나는 내가 해를 입는 일을 하도록 오랫동안 일깨워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보다 나의 잘못에 관해서
지적해 주는 사람이 좋다.
사탄은 무지를 창조했고,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따라서 고통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망상이 가지고 있는 마야의 힘, 즉 환영(幻影)의 생성물이다. 이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 행동하도록 하고, 그래서 고통을 가져다주며, 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해 알 수 없도록 하는 무지를 만든다. 스페인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정부군과 그의 적들인 양쪽 모두-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 악인가를 아는 특수한 지혜를 발전시키는 것이며 다시는 하지 않도록 다짐하도록 해야 한다.
부정이 부정과 싸우는 것은
정의를 구현시킬 수 없다.
인간의 실제적인 적은 무지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지복천년이 도래할 이 땅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인간의 이기심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무수히 많은 불필요한 고통은 인간의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일 수 있고, 입힐 수 있는 돈은 파멸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
세상적인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지에서 생겨난
이러한 이기심인 것이다. 사람은 그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할 때는 그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까지도 파괴시키는 불가피한
인과의 카르마 법칙으로 몰고 가게 된다.
인간의 무지에서 생겨난 세상의 비극을 보면 볼수록 나는 온 거리가 황금으로 포장되었다 해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행복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며 타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저버리는 데 있다. 각 개인이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고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한 의미를 지적하는 것이다.
모든 국가와 종교의 연합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합은 모든 개인이 신과 직접적인 만남을 인도하는
명상에 전력하게 될 때만이...
오는 것이다.
신과의 영적 교섭이 해결책이다. 인간이 신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지혜가 소수에게만 오고 모든 이에게 오지 않는다면 이 땅에 자유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이곳 조차도 자유가 절대적이지 못하고 괴로움은 여전히 많다.
우리들 각자가 우리의 국가와
모든 인간들을 위해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를 위해 자신의 가족과 모든 인류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통 인간의 관심은 그 자신이나 주위에 한정되어 있고, 신의 인간이 쏟는 관심은 전 세계에 있다. 여러분의 영적 의식으로 행한 일이 작다고 생각지 말라. 여러분의 임무는 매우 큰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을 알기 위해 여러분은 신과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신을 망각하고 있거나 그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아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
신 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신에 대한 무관심은 가장 큰 적이다.
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꺼린다면
결코 신을 알 수 없다.
신을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은 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내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자고 제자들에게 말하며 이러한 진리를 그들에게 깨우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 다.”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꼭두각시와 같다. .
일련의 습관, 감정, 정열, 그리고 감각들은,
인간 자신에게 그들의 명령에 따라 춤추도록 한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구속한다. 신을 알기 위해서 그 자신을 절제할 수 없거나
하려 들지 않는 사람은 신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이들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나는 때로는 음식을 먹기도하고 먹지 않기도 하며, 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자지 않기도 한다.
나는 모든 신체적 욕구에 대해
나 자신이 필요치 않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그 필요성을 포기했다.
신은 먹지 않고 자지도 않는다. 습관과 감각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인 것이며 ..
우리는 그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신을 알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모든 시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을 체험했다. 결국 신은 내게
이 세상에 대해 바라고 요구한 모든 것을 주셨다.
그 후 신은 내게 더욱 크고 무한한 선물을 주셨기에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렸다.
밤낮 가지게 되는 신의 기쁨 속에서,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욕망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명상은
무지의 안개를 거두어 낸다
현인 브야사가 기록한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너희의 타고난 지혜가 무지로 가려진다면 너희는 생을 거듭하며 미혹 속에서 비틀거리게 된다.”
라고 말했다.
“타 마식(무지한) 행동은 환영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판별하는 능력이 없거나 끼치는 영향은 무시하게 된다.
자신의 행운에 대한 손실과 타인 에게 끼치는 해. ”
즉, 무지의 안개가 명상에 의해 걷히게 되면 여러분은 바른 길을 볼 것이다.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며
영원한 성취감을 누릴 것이다.
“이 땅 위에는 결코 지혜보다 성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때가 이르러 요가의 모든 수련과정을 끝낸 헌신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알게 된다.”
이러한 진리들은 나에게 모두가 실제적이다.
진리는 실제성 그 자체이다.
자아실현은 인간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단지 개개인의 경험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신의 경험인 진리의 실현(단순한 교리가 아닌)은 모든 종교가 그의 신도들에게 가져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시킨 것을 우리 역시 경험해야만 한다.
그는 우리가 그를 인격체로서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는 그가 신과의 합일을 실현시킨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신의 율법으로써 또는 명상으로서만이 얻어질 수 있다.
그가 예수이기 때문에 예수를 숭배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생각했던
우주적 개념을 생각하고
그와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동안
특별한 육체로서 우리 과제를 배우기 위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조에 관한 신의 소설이 이미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가
생각해 보라. 내가 솔트레이크 시를 방문했을 때 나의 시야에 대양이 들어왔고 해변가를 거니는 커다란 코끼리가 보였다.
나는 최근에 고대의 매머드 해골이 그곳에 발견된 것을 알았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모든 습관과 한계를 던져버릴 수 있고, 모든 창조물에 우리의 의식을 펼칠 수 있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생물의 마음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별나라 너머까지도 다다를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광대함은
보다 큰 우주조차도 에워쌀 수 있다.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내부에 있으니
우리 또한 무한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무한성의 천체에
살고 있으며
단지 잠시 동안의
육체라는 것임을 안다.
여러분은 지금 구속받고 있다. 하지만 매일 깊은 명상을 통해 유한성에 무한성으로 여러분의 의식을 전환시킬 수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여러분은 육체의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여러분은 신의 자식이며 신으로부터 받은 타고난
권리까지 누릴 수 있는 삶을 신장시켜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신이 주장토록 하라
여러분의 정신이 어디에 있든지 그곳은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곳이다.
신이 여러분에게 놀고 책 보고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신은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신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안다.
여러분의 마음을 신으로 하여금 주장토록 하라.
신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신을 향해 명상하고 열심히 기도하라.
“주여 나는 당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 의식 너머에 계신 무한한 힘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소서.”
여러분이 신을 향해 명상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을 때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여러분의 형제로서
신께서 아파하심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
신은 여러분께 오신다.
여러분이 정말 신을 위해 희생할 때 그는 여러분의 사랑의 그물에 걸려드신다.
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 밖의 방법은 없다.
♧
지식은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사랑할 수 없다.
신에 대한 지식은 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은 라히리 마하사야가 주신 기법으로서
'크리야 요가' 훈련을 통해 얻어진다.
여러분은 신을 알 때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그분에게 복종시킬 것이다.
신에 대한 여러분의 헌신과 그분을 안다는 것이 완전해질 때까지
명상 중에 쉬지 말고 졸지 말라.
신 앞에서는 그 어떤 것의 쾌락을 위한 기쁨을 가지지 말라.
그의 사랑은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사랑이다.
여러분이 다른 일을 첫 번째로 생각하는 한
그분은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너무 오랫동안 늦추어져
여러분의 고통이 더욱 커지게 될 수 있다.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라. 여러분이 신과 영적 교섭을 하려고 노력해 온
여러분 양심의 성실성에 기인하여 확신토록 하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신을 느끼고
자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까지 쉬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
출생, 성장, 결혼, 자식, 노년기가 되면 일생은 끝이다.
그런 것은 삶이 아니다. 인생은
그 보다 훨씬 깊고 경이적인 것이라는 것을
나는 발견해 왔다.
여러분이 신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의 슬픔은 없다.
여러분이 사랑하 다가 죽음으로서 잃어버린 것 모두는
영원한 세계에서 다시 함께 한다.
여러분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것을 더 이상
어느 누구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신의 아름다움은 매우 크다.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위해
꽃을 즐기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들의 순수함과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욱 위대한 일이다.
음악 자체를 위해
그에 탐닉되어 있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신의 창조적인 음성을 듣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신이 창조물의 유한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하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형태와 한계의 너머에 있는 자체의
영원한 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한 지혜이다.
여러분은 내가 워싱턴 산과 엔시니타스 아쉬람에 있는 우리의 땅을 얼마나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결코 그들의 아름다움에 싫증 내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주는 내게 깨우치는 경험을 최근에 주셨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내 주위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 중의 하나가
어떤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었는데 또 다른 사람이 “안돼 파라마한사 지가 우리는 그런 짓을 하면 안된 다고 가르쳤어.”하고 말했다. 나는 불현듯 이것이 나의 육신으로 이미 여기에 있지 않을 미래의 상황을 목격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몸이 떨리는가 싶더니 평소의 의식 상태로 돌아왔다.
이 세상에 집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창조주의 우주적 드라마 속에 그 무수한 것들은 왔다가 사라진다.
나는 황폐해진 비행장과 죽은 바다, 그리고 미래의 다른 많은 일들을 본다.
마음속으로 나는 내가 없는 세상을 본다.
신이 주신 자유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혼을 위한 것이다.
어느 위대한 성자는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염려치 않습니다. 주여 내게 당신을 잊게 하는 벌만은 내리지 마소서.”라고 외쳤다.
예수는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모든 세상의 고통은 신을 만남으로서 떨쳐 버릴 수 있다.
고통의 악몽으로부터 깨어나라
여러분은 꿈속에서 적에게 쫓겨 길을 따라 달리는 자신을 볼 때가 있다.
갑자기 총에 맞는 것을 생각해 보라. “와! 큰일이구나! 내가 죽는구나.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슬프구나.”
그때 여러분은 죽은 자신을 보게 된다. 한 줌의 재로 간직될 때 여러분의 시체를 화장하는 형제와 친구들은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깨어나 단지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살아있다. 이는 실제로 죽을 때 있을 수 있는 일과
유사한 것이다.
신은 스페인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단지 죽음의 무서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내게 환시로 보여 주었다.
그들의 의식이 육체로부터 들리어지자 마자
그들은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자유로워 짐을 기뻐했다.
우리의 인생 경험은 하나의 꿈이다.
인간, 그 사람 자체가 전쟁의 악몽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희생자들이 그들의 육체로부터 내던져진 후
그들이 깨어나게 되면 그것은 단지 무서운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는 위대한 형이상학적 진리이다.
여러분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꿈속에서 나쁜 경험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꿈에 동일시되면, 깨어나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까지는 어떤 이가 여러분의 머리를 때려죽이게 되는 정말 무서운 경험으로 생각된다.
이는 역시 죽은 후에도 같은 것이다. 여러분이 한번 이 육체로 부터 벗어나와 보면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악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환시적 육체 속에서의 감금으로부터
벗어나는 의식의 느낌인 것이다.
그의 석방은 위대한 자유를 느끼게 하여 준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죽음이 임박해질 때 단지 꿈이라 생각할 수 있도록
명상이나 신과의 영적 교섭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준비시켜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이면 언제든지 죽음과 삶에 관한
꿈의 본질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육체에 대한 집착을 갖지 않는다.
신과의 합일을 통해
인생이 꿈이라는 것을 알자
여러분은 정신세계 속에서
인생이 하나의 꿈이라고 하는 신과의 합일된 상태에서 살아가라.
행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런 노력을 할 때 매우 쉽게 이루어진다.
고통이 닥칠 때 육체와의 동일시로부터
여러분의 의식을 떼어낸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강인하고 건강한 지금
지혜롭게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물질적 욕망은 무한성에 대한 욕망을 멀어지게 한다.
거의 매일같이 어떤 이가 내게 이것이나 혹은 저것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해 준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해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조롱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내가 왜 필요한 것인가?
여러분의 진정한 필요는 신이며, 그밖에 다른 필요성은 없다.
재산이나 음악, 책, 음식, 또는 즐거워하는 어떤 다른 감각에 집착하지 마라.
신 안에서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알도록 하라.
반면에 생활 속에서 여러분의 약속들은 떠맡겨질 것이며, 여러분은 그들로 결속된 채로 조용히 죽을 것이다.
여러분이 신과 하나이면 다시 여러분은 꿈속의 지상으로 환생되는 것에 강요받지 않는다.
여러분은 지상에서
신의 자녀로 섬기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고 오는 것에 대해 자유로워질 것이다.
여러분이 신의 기쁨 속에 살고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기계적으로 기도하게 되면
그 상태에 달하지 못한다.
신이 듣고 있다는 온전한 마음으로 완전히 여러분의 기도에 전념하라. 그렇게 열심히 사방으로 신께 기도하면 그분은 언제라도 올 것이다.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인간의 영원한 탐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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