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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우리를 갈라놓는 기차( 觀念) / El Tren Que Nos Separa

by 고요한 강 2022. 9. 6.

https://youtu.be/pGdf90bUYM8?si=FRuG3n1fguaWwVf3


고요의 원형(자아)을 깬 관념 /도하

종일 비 내리고
성큼 다가선 가을
짙 푸르름과의 이별
색깔 잎혀질 나뭇잎

갈망 근심 실망 두려움
애증 외로움  쓸쓸함
호불 호에 젖은 관념
허무를 느끼는 가을 사색

삶이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되어 있어,
신과 나, 자타, 호 불호, 미추로 분리한 고정관념,
차별화 개념화된 인식 차이로
사회는 이분법적 견해 속에서
조화와 균형 찾기 어려워 갈등한다
수 많은 견해 차이의 거대 물결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 남는 전투인 삶이다!
(가족 공동체서도  동일한 인식 차등으로 갈등한다)

허나, 역설적으로는 존재 자체가
그 어떤 바람에도 불구하고 꺽이지 아니하는
내 안에 지고한 빛 을 꺼내줄  지혜를
어이 발견치 아니하랴
한 발 앞으로 나아갈뿐 뒷걸음 치랴 . .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른 채
오직 하나인 나로써의 주인 의식을 갖기까지는
인식의 변환을 위해 스스로 자정 할 터 인 즉,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날 일이 일어날 뿐. . .
자연 순리에 맡기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인 것

( 자신에게 던지는 말)
절언 절려 무처불통 _그  무엇도 염려치 말지라
역경에 저항하는 근원을 볼 여유를 가질지니 _
마음의 양변 어딘가에  머물어 함몰 되지 아니하도록
오고 감 일체를_ 있는 그대로 보고
다만 흐르게 할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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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 안목은 좁고 편협되다는 각성 없어서
본래 고요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인데
이를 두고 장자는 참새 뱁새
물고기 곤과 붕새로
있는 그대로 순수 의식을 드러내 준다
의식 작용을 강설한 불교의 법 모르면
노자장자를 이해하긴 뜬구름이다
(장자 달마 /만물이 차등 없음을 설함)


[싯달타]
훈습된 이분법적 사고를 깨는 _
무위 자연을 닮고자 하는,
방하착의 시도_
굴절된 안목을 훤히 들여다 보는,
자아의 내밀한 보물(법)이 드러나는_
자각하는  길을 안내한다)

16,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진 절언(絶言)이란 말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이 끊어졌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음 순간에 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心地)의 자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심지(心地)의 자리가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해도 틀리고 무엇이라 입만 열면 틀리니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묵언(黙言)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절언이다. 그리고 생각이 끊어진 곳, 절려(絶慮)된 곳은 곧 무념(無念)에 든 곳이다.

무념에 든 곳은 곧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든 것 이고, 무상삼매에서는 ‘나’는 사라지고 법계와 하나가 된 것이니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다.
시공(時空)과 하나가 되었으니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법성 원융
무이상(法性圓融無異相) 제법부동 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했다.
법성(法性)인 대도는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모든 법은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달으면 알 수 있는 바이나 다른 경계가 아니라고 했으니,
대도(大道)는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고 한 것은 본래부터 시(時)와 공(空)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는 뜻이니, 생멸하는 말이나 생각과 상응할 수 없다.  

법성게의 법성은 신심명의 대도
(大道)요 지도(至道)이다. 그리고 법성은 원융하다고 했으니 이도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수행목적이 무처불통(無處不通)을 얻는데 있고, 무처불통(無處不通)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데 있다고 했다.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나름대로 개념화된 것이다. 개념화된 것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 .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 따라 기복(起伏)이 있게 마련 이다. 그러나 절언절려(絶言絶慮)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니, 무슨 생각이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이니 적정(寂靜)한 자리
혹은 해탈한 자리이다. 적정한 자리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각이 일어나도 움직이는 것이므로 고요함에 위배된다.
고요함 속에 있으려면 절언절려 (絶言絶慮)가 되어야만 한다. 절언절려할 수 있는 것은 무념(無念) 무상(無相)에 들은 것이고, 무념무상에 들게 되면 해탈하여 적정(寂靜)에 든 것을 의미함으로 불생불멸속에 있는 것이다.
이를 무상삼매(無相三昧)라 한다. 일체(一切), 즉 시공(時空) 이 하나가 된 자리이니 불생불멸하는 본래의 자리이고 무처불통(無處不通), 즉 통할 수 없는 곳이 없는 대도에 든 것이다.

이를 또 법성게에서는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했다. 즉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니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十方) 세계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한량없는 긴시간이 한 생각 순간이고, 한 생각 순간 속에 무량세월 들어 있네.’라고 했으니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 된다.

[출처] : 작성자 모르니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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