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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구름바람산
자작시

우리를 갈라놓는 기차( 觀念) / El Tren Que Nos Separa

by 고요한 강 2022. 9. 6.

Jacob Haibe-Der Tyroler Wastl: "Alles will ich brechen, beugen"


고요의 원형(자아)을 깬 관념 /도하

종일 비 내리고
성큼 다가선 가을
짙 푸르름과의 이별
색깔 잎혀질 나뭇잎

갈망 근심 실망 두려움
애증 외로움  쓸쓸함
호불 호에 젖은 관념
허무를 느끼는 가을 사색

삶이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되어 있어,
신과 나, 자타, 호 불호, 미추로 분리한 고정관념,
차별화 개념화된 인식 차이로
사회는 이분법적 견해 속에서
조화와 균형 찾기 어려워 갈등한다
수 많은 견해 차이의 거대 물결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 남는 전투인 삶이다!
(가족 공동체서도  동일한 인식 차등으로 갈등한다)

허나, 역설적으로는 존재 자체가
그 어떤 바람에도 불구하고 꺽이지 아니하는
내 안에 지고한 빛 을 꺼내줄  지혜를
어이 발견치 아니하랴
한 발 앞으로 나아갈뿐 뒷걸음 치랴 . .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른 채
오직 하나인 나로써의 주인 의식을 갖기까지는
인식의 변환을 위해 스스로 자정 할 터 인 즉,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날 일이 일어날 뿐. . .
자연 순리에 맡기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인 것

( 자신에게 던지는 말)
절언 절려 무처불통 _그  무엇도 염려치 말지라
역경에 저항하는 근원을 볼 여유를 가질지니 _
마음의 양변 어딘가에  머물어 함몰 되지 아니하도록
오고 감 일체를_ 있는 그대로 보고
다만 흐르게 할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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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 안목은 좁고 편협되다는 각성 없어서
본래 고요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인데
이를 두고 장자는 참새 뱁새
물고기 곤과 붕새로
엄청난 순수 의식을 드러내 준다
의식 작용을 설하는 불교 경전 모르면
노자장자를 이해하긴 뜬구름이다
(장자 달마 /만물이 차등 없음을 설함)

[싯달타]
훈습된 이분법적 사고를 깨는 _
무위 자연을 닮고자 하는,
방하착의 시도_
굴절된 안목을 훤히 들여다 보는,
자아의 내밀한 보물(진리)이 드러나는_
자각하는  길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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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언절려(絶言絶慮) 무처불통(無處不通)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느니라.
말이 끊어진 절언(絶言)이란 말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이 끊어졌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음 순간에 또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心地)의 자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심지(心地)의 자리가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해도 틀리고 무엇이라 입만 열면 틀리니 무엇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묵언(黙言)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절언이다. 그리고 생각이 끊어진 곳, 절려(絶慮)된 곳은 곧 무념(無念)에 든 곳이다. 무념에 든 곳은 곧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든 것이고, 무상삼매에서는 ‘나’는 사라지고 법계와 하나가 된 것이니 시간과 공간 개념이 사라진다. 시공(時空)과 하나가 되었으니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異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했다. 법성(法性)인 대도는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모든 법은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달으면 알 수 있는 바이나 다른 경계가 아니라고 했으니, 대도(大道)는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고 한 것은 본래부터 시(時)와 공(空)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는 뜻이니, 생멸하는 말이나 생각과 상응할 수 없다.  

법성게의 법성은 신심명의 대도(大道)요 지도(至道)이다. 그리고 법성은 원융하다고 했으니 이도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수행목적이 무처불통(無處不通)을 얻는데 있고, 무처불통(無處不通)은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데 있다고 했다.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나름대로 개념화된 것이다. 개념화된 것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 따라 기복(起伏)이 있게 마련 이다.
그러나 절언절려(絶言絶慮)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니, 무슨 생각이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이니 적정(寂靜)한 자리 혹은 해탈한 자리이다. 적정한 자리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각이 일어나도 움직이는 것이므로 고요함에 위배된다. 고요함 속에 있으려면 절언절려(絶言絶慮)가 되어야만 한다. 절언절려할 수 있는 것은 무념(無念) 무상(無相)에 들은 것이고, 무념무상에 들게 되면 해탈하여 적정(寂靜)에 든 것을 의미함으로 불생불멸속에 있는 것이다. 이를 무상삼매(無相三昧)라 한다. 일체(一切), 즉 시공(時空)이 하나가 된 자리이니 불생불멸하는 본래의 자리이고 무처불통(無處不通), 즉 통할 수 없는 곳이 없는 대도에 든 것이다.

이를 또 법성게에서는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 일체진중(一切塵中) 역여시(亦如是), 무량원겁(無量遠劫) 즉일념(卽一念), 일념즉시(一念卽是) 무량겁(無量劫)이라 했다. 즉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니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十方) 세계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한량없는 긴시간이 한 생각 순간이고, 한 생각 순간 속에 무량세월 들어있네.’라고 했으니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 된다.

[출처] : 작성자 모르니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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