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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 의식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_R.M.버크(Richard Maurice Bucke)

by 고요한 강 2022. 4. 11.

R.M. 버크 (Richard Maurice Bucke)

자아에서 우주의식으로

1
인류의 진화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가정이 틀리지 않았다면 과거에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능력들이 시시 각각으로 인류의 정신세계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우주 의식이란
지금 막 고개를 쳐들고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상태, 새로운 능력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우선, 그 새로운 감각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양된 개성이 있어서 그 '감각'의 출현을 위한, 전제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특수한 경우에는 인간이 지닌 보편적 능력들이 지극히 예외적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지성과 도덕적 능력, 그리고 월트 휘트먼의 경우처럼 특수한 감각의 완성을 주목해 보라. 이러한 능력의 진화가
모든 경우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일부의 경우에는 특이한 신체 조건 - 훌륭한 얼굴, 뛰어난 건강 엄청나게 부드러운 기질, 유난히 강한 친화력- 等이 눈에 뜨이기도 한다.

2
그 능력 자체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이해되거나 인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해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나 그의 초기 제자들은
그 능력을 '니르바나 Nirvana'라고 불렀다.


출생과 동시에 따라 나오는, 죄의식, 죽음의 공포, 부귀를 향한 욕망 따위의 저급한 정신 능력들의 '소멸'이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성의 탄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낡은 개성의 소멸은 새로운 자아의 창조와 동시에 일어나는, 낡은 자아의 사멸과 마찬가지 이다

'니르바나'라는 단어는
'석가세존이 최고의 목적,
최고의 선으로 동경해 마지아니한 상태'로 정의된다.

예수는 그러한 새로운 조건을
하느님의 왕국' 또는 '천국'이라고 불렀다.

그런 조건이 하느님의 왕국 또는 천국에 속해 있으며, 거기에는 그 가장 큰 특징인 행복과 평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주 의식에 들어가고 나서 그는
예수가 우주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은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개성, 다른 자아와 그 자신이 한 몸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제2의 자아를 '그리스도(신성하게 내려온 구원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인간 예수와 동일시되기보다,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내려온 구원자로서, 말하자면 예수(평범한 인간으로서 의식을 고양시킨)인 동시에 메시아(새롭고 보다 높은 인종의 모범)와 동일시된 것이다.

우주 의식을 갖는 사람들의 이 같은 이원적인 개성은 끊임없는 특징으로 여러 차례 등장할 것이다.

모하메드는 우주 의식을
'가브리엘 Gabriel'이라고 불렀으며,

자신 안에 살면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분명하게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단테는 그것을 '베아트리체 (행복 만들기)'라고 불렀는데,
천국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발자크는 그 새로운 인간을 '특수인'이라 부르고, 새로운 조건을 '특수성'이라 불렀다.
휘트먼은 우주 의식을 '나의 큰 영혼'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타인을 부르듯이 말하고 있다.

오, 억누를 수 없는 영혼
나는 그대와, 그대는 나와 함께
우리도 함께 배를 탄다.
오 영혼, 웃음과 수 없는 입맞춤..
오 영혼이여, 그대는 나를
나는 그대를 기쁘게 한다.

베이컨은 소네트에서 우주 감각을..
특히 뚜렷한 인격체로 취급했으며,

그에 따라 세상 사람들도 3백년 동안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문제의 그 '인격체'를 시인의 젊은 친구로 인정해 왔다.

3
한 종족이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게 될 때, 특히 이것이 우주 의식의 경우처럼 그 종족의 직접적인 진보와 연관된다면_
그 새로운 능력은 우선 종족의

최우수 표본에 의해서 획득되는 동시에 종족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말하자면 완전한 성숙을 누리는 바로 쇠퇴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주 감각의 도래에 관련된 사실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영적인 각성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발생 시기가 어느 정도 분명히 밝혀져 있으며,
당사자가 우주 의식에 들어간 연령을 보면, 우주 의식에 다다른 네 가지 사례들 가운데서,

한 경우가 24세이고, 세 경우가 30세, 두 경우 가 31세, 두 경우가 35세, 세 경우가 32세,
한 경우가 33세, 두 경우가 34세, 여덟 경우가 35세, 두 경우가 36세, 두 경우가 37세,
두 경우가 38세, 세 경우가 39세, 한 경우가 40세, 한 경우가 49세, 한 경우가 54세 등등이다.
4
우주 의식은 높은 지성을 갖추고
높은 도덕적 자질을 지닌 우수한 영혼의 소유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대체로 유기체의 조직이 최고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30세부터 40세 사이의 연령에 나타난다.

우주 의식의 즉각적인 선구자가 대단히 진보된 표본에서 독자적으로 중년에 먼저 나타나다가, 그 종족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보편적 성향을 띤다.
그리하여 보다 어린 연령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마침내 약 3세 정도의 건강한 개인 모두에게 나타나게 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추도 가능하다.
즉 성장의 단계가 모든 종족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덕적 본성의 결여와 상응하는
열등한 자질의 징표가 되는 시기가 온다는 뜻이다.
그러한 가정이 성립한다면
새로운 감각이 보편성을 확장해 가면서, 좀 더 젊은 연령에 나타나다가 마침내 여러 세대를 지나 사춘기 나 그보다 어린 시기의 모든 정상적인 개개인에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더욱 보편적으로 되고 더욱 어린 연령에 나타나다가, 결국 數千 世代를 지나
종족의 거의 모든 구성원에게 유년기부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5
우주 의식의 모든 경우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것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단순의식'과 '자아의식'과 '우주 의식'이 제각기 하나의 차원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제 차원을 점하고 있는 자아의식의 범위는...
모든 종에서 제 차원을 점하고 있는 단순의식의 범위보다_ 훨씬 광대하며, 따라서
우주의식의 범위가 자아의식의 범위보다 훨씬 광대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실상 그것은 종류와 정도의 모든 면에서
훨씬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가정한다면,

그들은 자아의식의 수준에서 생활하는 세계의 사람들보다 지적인 능력과 도덕적 및
영적인 진보의 정도, 그리고 성격의 다양성 등의 측면에서 서로 달라질 것이다.

우주 의식의 수준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신이 될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통상적인 인류의 차원을 뛰어넘을 만한 단계에 이를 수 없다.

그의 내면적 삶이 아무리 충실하고 탄탄하며, 새로운 감각으로 아무리 정화되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무리 타락했어도 )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은
단순 의식만을 가진 동물보다 무한히 높은 차원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주 감각을 부여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아의식 만을 가진 모든 사람들보다
무한히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만이라도
우주 감각을 가졌던 사람은

자아의식의 인간이 갖는 영혼의 수준으로 절대 떨어지는 일이 두 번 다시없다!

오히려 20년, 30년, 40년이 지난 다음에도 자신의 내면에서 그 신성한 각성이 주는 정화력과 고양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되며,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도 그의 영적인 성장이 보통 사람을 훨씬 초월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6
내가 채택한 가정에 따르면, 우주 의식의 사례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차 많아지고, 아울러 보다 완벽하고 분명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_ 과연 그러한가?
지난 2천~ 3천년 동안에 나타났다


잊힌 수백 건의 사례들 가운데서
적어도 열세 건의 경우는
너무도 거대해서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붓다, 예수, 바울, 플로티노스, 모하메드, 단테, 라스 RK사스, 존 이예뻬스, 프란시스 베이컨, 제이코브 베멘, 윌리엄 블레이크, 발자크, 월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이다.

붓다로부터 단테에 이르는 1800년 동안 우리는 다섯 건의 사례들을 알고 있다.

다시 단테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600년 동안 우리는 여덟 건의 사례들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360년마다 한 건씩의 사례가 있었는데 반해서, 그 후에는 75년마다 한 건씩의 사례가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우주 의식의 발생 빈도는 앞선 시대보다 후반기 시대에 4.8배나 높아진 셈이다

그렇다면 붓다 이전에는 어떠한가?

아마도 없었거나 있었어도 완전한 발달을 이루지 못한 경우만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의 사례들만큼 대단치는 앉지만, 많은 경우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숫자는 과거의 유사한 경우와 절대 비교될 수 없다.
(열세 건의 경우에 들지 못한 수 많은 사소한 사례들과의 비교를 뜻한다.)

위에서 말한 열세 건의 '거대한' 경우는
붓다의 출현 이래로 발생했던 사례 가운데서 그야말로 거대한 것만을 추려낸 단편일 따름이다.

거대한 경우에, 아주 작은 부분만이 세상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억 조차도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바울이 곧바로 뒤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예수의 행적과 이름은
그의 이야기를 들은 그 세대의 소멸과 함께 아주 완벽하게 사라져 가고 말았을 것이다.

7
우주 의식에 들어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처음에 어느 정도 당황한 나머지
그 새로운 감각이 혹시 정신병의 징후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모하메드도 깜짝 놀랐고, 바울도 그러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는 즉시 스스로에게 묻는 첫마디는 이렇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실제인가, 아니면 망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가?'

새로운 경험이
과거의 단순의식 및 자아의식의 가르침보다, 훨씬 실제적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당사자를 그다지 안심시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망상도 실제의 사실처럼
마음을 단단히 움켜잡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제의 그 경험을 갖는 사람은 결국 그 가르침을 믿고,
다른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르침의 진실성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정신병자의 망상도 마찬가지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감각이
당사자를 헛된 망상에 빠뜨리는 정신병의 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우선, 그 상황의 추세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정신병의 경우는 도덕을 무시하거나 부도덕성을 보이기도 하는 반면에
새로운 감각의 경우는 고도로 도덕적이다. 둘째로, 모든 형태의 정신병에서는
자기 억제력이 극도로 감소되거나 없어져 버리기까지 하는 반면에
우주 의식의 경우에서는 자기 억제력이 엄청나게 증대된다.

이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는 여기 인용된 사람들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 (혹 종교를 비웃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는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현대의 종교는 그 새로운 감각이 주는 가르침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스승'들은 그 새로운 감각에서 영감을 얻고,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스승의 책이나 추종자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얻는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주 의식이 정신병의 한 형태라면,
우리는 모든 고등 종교를 포함한 우리의 문명이 망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무서운 대안을 인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다른 감각이나 능력에 부합하는
실제성과 똑같은 객관적 실제성(이러한 새 능력과 상응하는)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시각을 관찰해 보자.
저기, 저 들판 너머에 서 있는 나무는 실제이며 절대 환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각을 갖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나무를 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환각이라면 당신 자신을 뺀 나머지 모두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추론 법으로 우리는 우주 의식에 부합하는 객관적 우주의 실제성을 수립할 수 있다.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 능력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실을 의식하게끔 된다.

만일 세 사람이 나무를 보고 나서 한 시간쯤 후에 그 나무를 묘사하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비록 세부적으로 일치되지 않더라도 큰 테두리 안에서 일치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 의식을 경험한 사람들의 보고도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되는 것이다.
(다소간의 차이점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보고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그 보고를 오해한
우리 마음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동일한 체험을 통과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8
이미 드러났거나 적어도 암시된 바와 마찬가지로 우주 의식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 당사자는 자아의식계의 최상층에 속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범한 지적 능력(흔히 이 능력이 실제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는 일이 많지만
우주 의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을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가 이러한 점에서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그는 훌륭한 영혼, 훌륭한 건강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양된 도덕적 본성, 강한 자비심, 따뜻한 가슴, 용기,
진지하고 꿋꿋한 종교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자아의식의 최상층부에 이를 수 있는 연령에 도달했다면,
그는 언젠가 우주 의식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경험은 무엇인가?
세부적인 부분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기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앞으로 제시되는 내용도 따라서 일반적인 윤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잠정적으로는 정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1)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갑자기 화염이나 장밋빛 구름 속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혹은 마음 자체가 그러한 구름이나 안개로 채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2)
바로 그 순간에_희열, 확신, 승리, 구원의 정감에 흠뻑 젖게 된다.
마지막 '구원'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면 완전히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충분히 계발되었을 때 그 느낌은 특정한 구원의 행동이 달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특수한 구원도 필요치 않고 세계가 세워져 있는 기틀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절정감이야말로 자아의식이 재배하는 삶을 넘어서
모든 시인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경지이다.

붓다는 '경전'에 담긴 설법에서, 예수는 '비유'에서 바울은 '서한'에서
단테는 '연옥'의 끝과 '천국'의 시작에서, 셰익스피어는 '소네트'에서, 발자크는 '세라퓌타'에서,
휘트먼은 '풀잎'에서, 에드워드 카펜터는 '민주주의를 향하여'에서, 자아의식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쾌락과 고통, 사랑과 미움, 환희와 비애, 평화와 전쟁, 삶과 죽음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들은
'풀잎'에 표현된 것처럼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절대로 집 안에서
사랑이나 죽음을 __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곧 낡은 관점과 낡은 함축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


3)
위에서 말한 감각 또는 정서적 경험과 동시 아니면 곧바로 뒤를 따라서,
묘사하기 힘든 지성의 각성이 나타난다.
마치 한 줄기 섬광처럼
만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뚜렷한 개념(통찰력)이 그의 의식에 나타난다.

그는 단순히 그것을 믿게 될 뿐만 아니라,
자아의식으로 보면 죽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는 우주가
사실상 그와 전혀 다른,
살아 움직이는
실체임을 보고 느끼게 된다.

인간은 생명이 없는 무한한 실체의 바다에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의 바다에 얼룩진 상대적인 죽음의 그림자임을,
그는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생명이 그러하듯이
인간에 깃든 생명이 영원하며,
신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영혼도 결코 죽지 않음을 본다.

우주는 분명히_모든 구성원이
각자와 전체의 선을 위하여
힘을 합쳐 일하도록 짜여 있으며,
이 세계를 떠받치는 원리는 사랑이므로 모든 개별자의 행복도
궁극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그는 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거친 사람은
순간적으로, 몇 달이나 몇 년에 걸친 공부로 얻는 것보다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그는 상상이나 사색 따위의 일상적인 자아의식에 속한 개념이 스러짐에 따라서
거대한 전체의 개념을 얻게 된다. 머리로 만물과 그 의미를 포착하려던 시도는
그 얼마나 어리석은 모험이 었던가!

이 같은 지혜의 각성은
제이코브 페멘을 평한 어느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이야기한 신비는 그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신비를 본 것이다.
모든 대립과 상충하는 원리들, 강함과 부드러움, 엄격함과 온화함, 달콤함과 쓰디씀,
사랑과 슬픔, 천국과 지옥 -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모든 신비의 뿌리를 보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을 보고, 그 궁극적인 결과 속에서 모든 것의 조화를 꾀했다.
그는 신성의 탄생을 드러내는 신의 존재를 꿰뚫어 보았다.
자연도 그에게 모든 비밀을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 편안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던 그의 책에서 휘트먼도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결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손대는 사람은, 책이 아닌 한 인간을 손대는 것이다')
세 겹의 삶을 가진 인간이라는 소우주였으며, 그의 통찰에 대한
특허권과 같은 것이었다."

4)
도덕적인 향상과 지성의 각성을 따라서 불멸의 감각이 찾아온다
(더 좋은 단어가 없어서 그대로 사용한다).
이것은 문제의 해답과 같은
지적인 확신도 아니며, 모르는 것에 대한 학습과 같은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초적 이어서, 독자적인 개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각자의 확실성 정도에나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5)
각성과 함께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시시각각으로 따라다니면서
괴롭혀 오던 죽음의 공포가 마치 낡은 가면처럼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 하는 추론의 결과가 아니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6)
죄의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가 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할 죄의 존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다.

7)
각성의 순간성은 대단히 특이한 자질의 하나이다. 감춰져 있던 경치를 드러내 주는
칠흑 같은 밤하늘의 번개 정도에나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8)
새로운 삶에 들어선 사람의 예전 성격은 중요한 요소이다.

9)
따라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연령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만일 우주 의식의 각성이 20세에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우리는 우선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가 스스로 진정한 영혼의 거인임을 입증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10)
우주 의식에 도달한 사람의 인격에 부가된 매력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1)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며, 짧은 순간이지만 나중까지도 각성 상태가 계속된다.
또한 각성된 당사자의 외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는 커다란 환희를 맛본 사람의 변화된 모습과 유사하다.
때로는 그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각성이 강렬한 경우에는 이러한 변화도 강렬하여, 참된 변용에 이를 수도 있다.

단테는 '신으로 변했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 순간이 목격될 수 있었다면
오로지 변용이라는 말로만 불릴 수 있는 현상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9
지성을 기준으로 하면, 자아의식으로부터 우주 의식에 이르는 통로는
단순 의식으로부터 자아의식에 이르는 통로와 완전히 평행되는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후자와 마찬가지로 전자에도 두 가지 주요한 요소가 있다.

1) 의식의 첨가
2) 능력의 첨가

1) 단순 의식만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가 자아의식에 도달할 때,
그 유기체는, 처음으로 자신이 독립된 생물체임을 의식하게 된다.
혹은 자기와 격리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능력의 접근이 아무런 경험이나 학습의 과정이 없이
해당 유기체에 그러한 의식을 지시해 주는 것이다.

2) 동시에 그 유기체는 지식을 축적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엄청나게 증대된 힘을 얻는다.
따라서 자아의식만을 가진 사람이 우주 의식의 문에 들어서면,
첫째, 그는 배우지 않고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게 된다.

우주는 죽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이다.
본질과 목적상 우주는 무한히 선하다.
개별적인 실존은 소위 죽음이라는 것을 넘어서, 연속적이다.
이와 함께, 둘째, 그는 배움과 행동 모두에 대한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된다.

10
도덕적인 본성도 마찬가지이다.
단순 의식만을 가진 동물은, 건강한 청년 또는 중년의 남녀가 가진,
단순한 삶의 순수한 기쁨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마)이나 개(견)는 삶을 즐기면서 즐거운 감각을 경험하지만,
그 속에서 감각이나 외부의 사물로부터 독립된,
일상의 평온을 깨달을 수는 없다.

그것은 유기체가 영위하는 삶의 중심으로부터 시작되는 도덕적 본성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본성의 영역에서, 감각이 있는 생명체가 단순 의식으로부터
자아의식으로 건너갈 때 딛는 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식에서 우주의식에 이르는 통로에 속한 도덕적 상승은,
단순 의식에서 자아의식으로, 또 자아의식에서 우주 의식으로 넘어갈 때
지성이 취하는 단계와 일치한다. 이것은 오직 그러한 경험을
직접 거친 사람들만이 깨닫고 묘사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붓다와, 다른 불교의 깨달은 자들은 '열반' 즉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깨달은 사람임이 분명한 작자가 쓴

마하바라타는 이렇게 말한다.

"그 행복도 스스로의 내면에 있고, 그 빛도 스스로의 내면에 있으면서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귀의자는 브라흐만의 지복을 얻는다.


"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구한 '천국'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를 보라.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돌린 가치와 아울러 그가 어떻게 제3의 하늘에 들어갔는가를 기억하라.

인간으로부터 '신으로' 탈바꿈한 단테의 변용과 그가 우주 의식에 붙인 이름
'베아트리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우주 의식에 속하는 희열을 이야기한 그의 노래가 있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내게는 만물의 웃음으로 보였다.
나의 취한 몸이 듣고 보는 것을 뚫고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오 환희여!
사라지지 않는 희열!

오직사랑과 평화만의
생명이여!"  
같은 주제를
말하는 페멘의 글도 보라.

"신의 내면에 감춰진,,,
경이로움에 깃든 환희, 행복, 사랑스러움을 표현하기에는,
이 지상의 언어가 너무도 부족하다.

영원한 동정녀가 우리의 마음에 그 모습을 그려준다고 해도
남자의 구조는,
너무도 차갑고 어두워서

그 모습의 한 개 점조차도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엘루크하남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외치는 소리도 들으라.

"기쁨, 언제나 기쁨!"

그리고 에드워드 카펜터의 목소리도 들린다.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깊고 깊은 내면의 환희가
바다를 이루어 끝나지 않는 환희의 노래를 부르네."

무엇보다도 항상 변하는 언어로 쓰였지만 변치 않는 증언인
휘트먼의 노래를 기억하라.
그의
40년간의 삶을 망라한
'풀잎'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 있다.

"만족한다 -
보고, 춤추고, 웃고, 노래한다."


"내가 자신의 빛, 스스로의 환희에 놀라서 방황하노라."
"오, 내 영혼의 환희,
새장을 나와서 번개처럼 날아간다."

"당신,  오! 죽음을 노래하는
환희에 싸여,
나는 이 찬가를 물에 띄우노라."
이어서 그는 자기 가슴으로 받아들인 미래를 예언한다.

"이 계단을 지나
수억의 훌륭한 사람들이 걸어갈 때." 그들이 바로 우주 의식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한다.

"환희로 가득 찬 바다 -
어디나 환희뿐! 환희, 환희!

자유와 신앙과 사랑의 환희! 생명의 절정에서 맛보는 환희!
'그저 존재하고 있고, 숨 쉬고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
환희, 환희! 모든 것이 환희!"

11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럼 이들이 그 모든 것을 보고 알고 느낀다면 왜 쉬운 말로 펼쳐서
이 세상에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지 않는 것인가?"

바로 이것은
'말'이 휘트먼에게 던진 질문과 같다.
"월트, 자네가 갖고 있는 건 충분하고도 남아.
이제, 좀 쏟아 놓는 게 어떤가?"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찾은 회상의 것을 말하려고 할 때, 나는 할 수 없다.
내 혀가 돌지 않고, 내 숨도 가슴의 명령을 거부하니
나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간' 바울은
'말(언어)로 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단테도 하늘나라에서 본 것을 다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환시는 우리의 언어보다 훨씬 광대해서
오로지 광경 그 자체일 뿐이었다.

" 물론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사실상 간단하다.

언어란 자아의식의 머리가 만들어낸 계산이므로,
오로지 그 것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우주 의식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표현이 가능하더라도 그 것
자아의식의 술어로 번역되고 말 것이다.

12
독자들을 위해서
우주 감각의 특징들을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1) 주관적인 빛
2) 도덕적 상승
3) 지성의 각성
4) 불멸의 느낌
5) 죽음의 공포가 사라짐
6) 죄의식이 사라짐
7) 갑작스럽고 즉각적인 각성.
8) 예전의 인격적 특징, 지성, 도덕, 육체
9) 깨달음의 연령
10) 남녀 모두 강하게 타인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개성에 덧붙는다
11) 변화 주체의 변용 우주 의식의 존재를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음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_R.M. 버크(Richard Maurice Bucke)

(옮김) 15, 04 13

美, 詩人_월트 휘트먼

https://youtu.be/TXOwd9 JK_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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