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제(jeya))(연꽃사진 작가)
깨어라 ...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욕망이 일어날 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행복이나 슬픔이 그대를 덮쳐도
그저 나아 갈 뿐,
흔들리거나 執捉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가족이나 권력이나 재물을 바라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이 옳지 않게 무엇을 바라리요.
극히 적은수의 사람들만이
강을 건널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쪽 강변을 방황한다.
그들은 생사의 언덕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법의 길을 따라가는
지혜로운 이는
죽음의 끝을 넘어가는구나.
그는 어둠의 길을 버리고
빛의 길을 간다.
그는 집을 버리고
행복을 찾아 어려운 길을 간다.
욕망과 소유를 버려라.
가슴속의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라.
지혜로운 사람은
애착과 욕망을 버리고
각성의 일곱 가지 빛을 따라
자유를 한껏 즐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비추는 ...빛이 된다.
순수하고 자유롭게
빛나는 빛이 된다.
붓다가 되라!
인간은 불행 속에 산다.
그것은 인간이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과 잠재성, 성장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가 지옥을 창조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대의 의식이 그 본성 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다.
이 말을 명심하라.
그대의 의식이 그 자체 안 에서 휴식하는 것--
이것이 지복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안에서 휴식하는 것은 곧 지혜롭게 되는 것이다.
'wise'라는 영어 단어에는
'buddha'라는 단어에 부합되는 심오한 의미와 깊이가 없다.
이 경전에서 '지혜로운 사람(wise man)'이라는 단어와 마주칠 때마다
그 말은 '붓다'라는 단어의 번역임을 명심하라.
동양에서 '붓다'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지혜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이다. 지혜는 지식보다 훌륭하지만
불성(buddhahood)은 그 이상의 궁극이다. 불성은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식은 객관적인 지식, 즉 그대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지식은 정보 이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물의 내부에 들어가 사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외부에서만 사물을 관찰 할 수 있다. 그대는 아웃사이더로 남을 것이다.
학문은 일종의 지식이다. 'science'는 단어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지식을 의미한다.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객관적 대상이다. 그대는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 외부의 사물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그대는 사물의 주변을 빙빙 돌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관찰할 수 있다. 무게를 달고, 계산하고, 분해하고,
그런 다음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 결론은 유용하고 실용적일 것이다.
그 결론은 그대를 더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지혜는 주관적 지식이다.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자'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이다.
불성은 지식과 지혜 둘 다를 초월한다. 불성에는 객관도 주관도 없다. 모든 이중성이 사라진다.
아는 자도 없고 알려지는 것도 없다. 관찰자도 없고 관찰되는 것도 없다. 오직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원하는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다. '신'이라 부를 수도 있고 '니르바나'로 부를 수도 있다.
또는 '사마디'나 '사토리'로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오직 하나가 남는다. 둘이 하나 안으로 용해된다.
영어에는 이 궁극적 초월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다. 실제로 서양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실체에 대한 동양의 접근 방법은 서양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동양의 방식으로 보나 서양의 방식으로 보나
똑같아 보이는 것들이 있다. 표면에서 보면 아주 유사한 결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면 큰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것도 일반적인 차이점이 아니라 엄청난 차이점이 발견된다.
며칠 전, 나는 선의 신비주의자인 바쇼의 유명한 하이쿠를 읽었다.
그 시는 서양적인 마음을 가진사람들, 또는 서양식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다지 훌륭한 시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전세계가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에 관한 한 동서양의 구분이 사라졌다.
이 시를 주의 깊게 들어보라. 이 하이쿠는 그대가 훌륭하다고 부르는 시는 아닐지 모르지만
훌륭한 통찰력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엄청난 시가 들어 있다. 하지만 그 시를 느끼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해야 한다. 지적으로는 그 시를 이해할 수 없다.오직 직관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이것이 그 하이쿠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울타리 옆에
나주니아 꽃이 피어 있다!
이 시는 훌륭한 시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 깊은 감정 이입의 상태에서 들어가보라.
바쇼의 시는 영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유한 언어로 된 원문에는 전혀 다른 풍미가 있다.
나주니아는 길가에 저절로 피어나는 아주 흔한 꽃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다.
나주니아는 소중한 장미꽃도 아니며 희귀한 연꽃도 아니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잠시 연꽃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또는 바람과 햇빛 속에 춤추는 아름다운 장미... 몇 초 동안 장미는 그대를 사로잡는다.
장미는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주니아는 아주 평범하고 흔한 꽃이다. 가꿀 필요도 없고 정원사도 필요없다.
나주니아는 아무 데서나 저절로 잘 자란다. 나주니아 꽃을 주의 깊게 보려면 명상가가 되어야 한다.
매우 민감한 의식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나주니아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없다.
그러나 아주 평범해 보이는 것이 나주니아의 아름다움이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삼라만상이 신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나주니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깊은 감정이입의 상태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대는 놓칠 것이다.
처음으로 바쇼를 읽을 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
울타리 옆에 핀 나주니아가 뭘 그리 대단하다고 난리인가?'
바쇼의 시에서 마지막 음절은 일본어로 '가나(kana)'인데 그것은 느낌표로 번역되었다.
영어에는 그것을 번역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가나'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경이롭다! 이 나주니아의 아름다움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나주니아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쇼의 의식에서는 이 나주니아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장미와 연꽃 등 모든 훌륭한 꽃이 빛을 잃을 정도이다. 이 나주니아가 그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가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왔는가?
나주니아에서 왔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울타리 옆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이 작은 꽃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쇼는 나주니아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으며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나주니아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랬다면 모든 사람이 나주니아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쇼의 통찰력과 열린 가슴, 감정이입의 상태, 그의 명상적인 자세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명상이 변형의 연금술이다. 명상은 쇠를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
나주니아를 연꽃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주의 깊게'라는 단어는 각성된 의식으로,
사랑과 관심을 갖고 명상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대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지나치듯이 볼 수 있다. 그 때엔 모든 핵심을 놓칠 것이다. '
주의 깊게'라는 단어의 모든 의미를 명심해야 하지만 그 근원적 의미는 '명상적으로'이다.
명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마음없이 본다는 의미이다.
그대 의식의 하늘에 한 점 구름도 없이, 기억이나 욕망의 구름이 지나가지 않고,
아무것도 없이 완전히 텅 빈 하늘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런 무심의 상태에서 보면
나주니아꽃조차 다른 세계로 들어선다. 나주니아꽃은 낙원의 연꽃이 된다.
나주니아는 더 이상 지구에 속하지 않는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발견된다. 이것이 붓다의 길이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것, 지금 여기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
붓다는 이것을 '여여(如如 tathata)'라고 부른다.
바쇼의 하이쿠는 '여여'의 하이쿠이다.
사랑과 관심을 갖고 보는 이 나주니아꽃,
가슴을 통해, 구름 한 점없이 청명한 의식을 통해,
무심의 상태에서 보는 나주니아꽃...
그때 바쇼는 경탄한다. 커다란 경이감이 솟아오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주니아꽃이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나주니아꽃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면
바쇼가 붓다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나주니아에 그토록 훌륭한 시가 담길 수 있다면
돌멩이 하나마다 가르침이 될 수 잇다.
주의깊게 살펴보니
울타리 옆에
나주니아꽃이 피어 있다!
'경이롭고 말문이 막힌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넌지시 암시할 수 있을 뿐.'
하이쿠는 힌트(hint)이다. 시가 묘사한다면, 하이쿠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암시할 뿐이다.
테니슨의 유명한 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견된다.
바쇼와 테니슨을 비교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쇼는 직관을 대표하지만, 테니슨은 지성을 대표한다.
바쇼는 동양을 대표하고, 테니슨은 서양을 대표한다.
바쇼가 명상을 대표한다면, 테니슨은 마음을 대표한다.
두 사람의 시는 아주 비슷해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테니슨의 시가 바쇼보다 더 시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테니슨의 시는 직접적이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갈라진 벽 틈새에 피어 있는 꽃,
나는 너를 뿌리째 뽑아 들었다.
작은 꽃, 하지만 너를
뿌리째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있을 텐데.
아름다운 시이다. 하지만 바쇼의 하이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어느 점에서 테니슨이 완전히 입장을 달리하는지 살펴보자.
갈라진벽 틈새에 피어 있는 꽃,
나는 너를 뿌리째 뽑아 들었다.
바쇼는 단지 꽃을 바라볼 뿐 뽑지 않는다. 바쇼는 수동적인 각성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테니슨은 활동적이고 폭력적이다.
사실, 진정으로 꽃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 꽃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꽃이 그대의 가슴에 닿았다면 어떻게 그 꽃을 뽑을 수 있겠는가?
뽑는다는 것은 파괴를 의미한다. 그것은 살상이다!
그런데 아무도 테니슨의 시를 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파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마음은 파괴적이다. 마음은 소유를 원한다.
그리고 소유는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무엇인가 소유할 때마다 그대는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여자를 소유하는가? 그렇다면 그녀를, 그녀의 아름다움과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대는 남자를 소유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그를 일상용품같은 물건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바쇼는 그저 바라본다. 시선을 집중시키지도 않고 그저 바라 볼 뿐이다.
마치 나주니아를 상처 입힐까봐 두려운 듯이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런데 테니슨은 벽의 틈새에서 꽃을 뽑아들고 말한다.
갈라진 벽 틈새에 피어 있는 꽃,
나는 너를 뿌리째 뽑아들었다.
작은 꽃--
테니슨은 꽃과 분리되어 있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아무 곳에서도 만나지 못한다.
서로에게로 용해되어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사랑의 체험이 아니다.
테니슨은 꽃을 공격하고 뿌리째 뽑아들었다!
마음은 항상 소유하고 통제하고움켜쥘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러나 명상적인 의식은 소유와 통제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폭력적인 마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작은 꽃--
꽃은 보잘 것없는 존재이며 테니슨은 높은 위치에 있다.
그는 인간이고 훌륭한 지식인이며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여전히 에고 안에 갇혀 있다. 작은 꽃--
그러나 바쇼에게는 비교의 문제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주니아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초월을 가쳐다준다.
나주니아꽃이 울타리 옆에 피어 있다. 가나... 그리고
바쇼는 존재의 깊은 곳까지 충격을 받아 경탄할 뿐이다.
나주니아의 아름다움이 그를 지배한다.
그가 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꽃이 그를 소유한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굴복한다.
순간의 아름다움, 지금여기의 은총에 복종한다.
작은 꽃, 하지만 너를
뿌리째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감상과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해가 있어야 하고 지식이 생산되어야 한다.
테니슨은 지식을 갖지 못하는 한 마음이 편치 않다. 꽃은 물음표가 되었다.
테니슨에게 있어서 꽃은 물음표이다. 그러나 바쇼에게는 느낌표이다.
물음표와 느낌표, 여기에 큰 차이점이 있다.
바쇼는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사랑이 곧 이해이다. 사랑보다 더한 이해가 있는가?
그런데 테니슨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에게는 마음이 있다. 지식을 갈망하는 마음이...
하지만 너를
뿌리째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마음은 완벽주의자가 되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마음은 아무것도 미지로 남겨놓을 수 없다. 아무것도 미지와 신비로 남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뿌리째 남김없이 이해되어야 한다.
마음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한다. 지식은 힘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뭔가 신비로운 것이 있다면 그대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신비한 것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비의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대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지 않는가? 그것이 그대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신비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과학은 우리가 어떤 것도 미지의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가지(不可知)로 남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역설한다.
과학은 존재계를 알려진 세계와 미지의 세계로 나눈다.
이미 알려진 것은 어느 땐가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미래의 어느 날엔가 알려질 것이다.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 사이에 큰 차이점은 없다.
다만 조금 더 많은 노력과 연구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 미지의 모든 것이 알려질 것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알려진 세계로 끌어내려야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와 사랑, 신비가 모두 사라진다. 경이로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신이 사라지고 노래가 사라지고 축제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알려지면, 그때엔 가치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삶의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진다. 이 모순을 보라. 마음은 먼저 "모든 것을 알아라!"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은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그대는 모든 의미를 파괴하고 나서
이제는 의미를 갈망한다. 과학은 의미를 파괴한다.
과학은 모든 것일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제 삼의 카테고리,
즉 영원히 미지로 남을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의 의미는 알려질 수 없는 것 안에 있다.
아름다움, 신, 사랑, 기도의 위대한 가치들,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중요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제 삼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불가지는 신과 신비, 기적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대의 가슴속에 아무 경이감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경이감이 없다면 가슴은 결코 가슴이 아니다.
그대는 엄청나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은 것이다.
그대의 눈은 먼지가 끼어 투명한 시력을 상실한다.
그때엔 새가 노래를 해도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설명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엔 푸른 나무를 보아도 그 푸름이 그대로 하여금 춤추거나 노래하게 만들지 못한다.
가슴 속에 시를 만들지 못한다.이미 설명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를 푸르게 만드는 것은 엽록소이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설명이 개입되면 詩가 사라진다.
만일 불가지의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장미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아름다움은 장미의 화학적인 성분이 아니다.
장미를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아름다움이라는 성분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가지의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을 아무리 분해해 보아도 영혼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신을 찾아도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를 놓칠 것이다. 마음은 신을 객관적 사물로 대상화시키고 싶겠지만 신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진동(vibration)이다. 만약 존재계의 소리없는 소리와 파장을 맞춘다면,
한 손에서 나는 손뼉 소리를 듣는다면,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 '아나하드(anahad)'라고 부른
존재계의 궁극적인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대는 오직 신만이 존재할 뿐
그밖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신과 존재계는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적으로 이해되거나 지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테니슨이 놓친 점이다. 테니슨은 말한다.
작은 꽃, 하지만 너를
뿌리째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테니슨의 이해는 '그러나'와 '만일'의 상황이다.
바쇼는 '가나'라는 느낌표를 통해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안다. '
경이로고 놀라운 일이다... 울타리 옆에 핀 나주니아꽃!'
아마 그때는 보름달이 뜬 밤이거나 이른 아침이었을 것이다.
나는 바쇼가 숨을 멈춘 듯이 움직이지 않고 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본다.
나주니아꽃... 얼마나 아름다운가! 과거와 미래가 사라졌다. 마음속에는 아무 의문도 없다.
다만 순수한 경이감이 있을 뿐.바쇼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눈으로, 관심과 사랑의 눈으로 나주니아꽃을 본다.
그 사랑과 관심 안에 전혀 다른 종류의 이해가 있다.
그 이해는 분석적이거나 지적인 이해가 아니다.
테니슨은 모든 현상을 지식화하고 그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테니슨은 서양을 대표하고, 바쇼는 동양을 대표한다.
테니슨이 남성적인 마음을 대표한다면, 바쇼는 여성적인 마음을 대표한다.
테니슨은 마음을 대표하고, 바쇼는 무심을 대표한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라. 그런 연후에 우리는 고탐 붓다의 경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욕망이 일어날 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간단한 문장이지만 아주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깨달은 자들은 욕망에 의해 불행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부산물이다.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욕망을 갖는다.
그리고 욕망에 의해 더 많은 불행을 창조한다.
불행을 직접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불행의 뿌리 자체를 잘라야 한다.
그 불행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 연기가 어디에서 솟아오르는지 알아야 한다.
그대는 뿌리에 닿을 때까지 땅속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
붓다는 이 뿌리를 'tanha', 즉 '욕망'이라 불렀다.
마음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단 한 순간도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욕망의 행렬이다.
마음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른다. 아무것도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얻는 순간 그것은 끝난다.
얻는 순간 그대의 마음은 더 이상 그것에 관심이 없다.
마음의 속임수를 관찰하라.
그대는 아름다운 집을 갖기 위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러나 집이 그대의 것이 되는 순간 돌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대가 그 집에 가졌던 꿈과 환상이 일순간에 날아간다.
그 집에 몇 시간, 기껏해야 며칠만 살면 다시 다른 집을 욕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그렇게 똑같은 함정, 똑같은 궤도를 돌며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그대는 어떤 여자를 원했는데 이제 그녀를 차지했다.
그대는 어떤 남자를 원했는데 이제 그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얻었는가?
모든 환상이 사라졌다. 대신 절망이 남았을 뿐이다!
마음은 오직 욕망밖에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마음은 결코 만족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족은 마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마음의 생명줄이다.
붓다는 말한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이 말은 '만족하라'는 뜻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대에게 필요한 것 이상이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고 심오하다.
담장 밑에 핀 나주니아꽃을 보라!
그대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별, 태양, 달, 꽃, 산, 강, 바위, 동물들, 새, 사람들... 이 세상은 가장 완벽한 세상이다.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겨라.
그대 주변에 계속되고 있는 축제를 즐겨라. 그 축제는 끊임이 없다.
별들은 계속 춤추고
나무들은 기쁨에 겨워 흔들거린다. 새들이 노래한다.
공작새가 춤추고 뻐꾸기가 그대를 부른다. 그런데 그대만이 불행하다.
마치 불행해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불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불행할 이유가 없다.
존재계의 현재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대가 할 일은 그저 휴식하고 즐기는 것뿐이다.
그대와 전체 사이의 분리를 없애라.
그 분리는 욕망에 의해 생긴다. 욕망은 불만을 의미한다.
욕망은 모든 게 마땅히 존재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은 그대가 자신을 신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욕망은 그대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욕망은 어리석음이다. 무욕이 지혜이다.
무욕은 만족의 상태, 매순간 전체적이고 만족한 상태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것도 원하지 말라.
욕망이 일어날 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붓다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에 의해 즉시 욕망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욕망은 그대의 습관이 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그대는 수많은 생동안 계속 욕망해왔다. 거의 자동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대가 없어도 욕망은 혼자 힘으로 계속 움직일 것이다. 욕망은 스스로의 운동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단지 욕망 때문에 불행이 생긴다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해서,
욕망할 필요가 없으며 해와 바람과 비를 즐기면 그만이라고
이해한다고 해서 욕망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이 일어날 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욕망이 일어날 때엔 그저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욕망을 표현하지도 억누르지도 말라. 욕망을 비난하지도 싸우지도 말라.
욕망을 평가하지 말라. 다만 주의 깊게 지켜보라.
담장 밑의 나주니아꽃을 보듯이
찬성이나 반대의 편견없이 그저 지켜보라.
그대는 붓다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욕망에 반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붓다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욕망은 다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욕을 욕망한다면 그것은 다시 틀에 박힌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무욕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욕망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 지켜봄 안에서 서서히 욕망이 제 스스로 죽어간다.
이것이 깨달은 자들 모두의 구체적인 경험이다.
나 또한 그런 현상의 산 증인이다. 나는 붓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욕망을 지켜보라.
그러면 욕망은 서서히 제풀에 지쳐 죽어간다.
그대는 욕망을 죽이지 않는다. 욕망과 싸우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대가 비난하면 욕망은 미끄러지듯 도망가서무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그 다음에는 그곳에 숨어서 그대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만일 욕망을 억누른다면 그대는 쉬지 않고 계속 억눌러야 할 것이다.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욕망을 억누르는 데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꿈 속에서 욕망은 다시 표면으로 뚫고 올라올 것이다.
그것이 정신분석학이 꿈을 연구하는 이유이다.
정신분석학은 그대가 깨어 있을 때를 믿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그대의 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꿈은 그대가 억누르고 있는 것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건 억눌린 것은 매우 강력해진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파고들어 그곳에서 그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적은 더 막강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붓다는 욕망에 맞서 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다.
"욕망은 어리석음이다. 그 욕망이 불행을 창조한다.
욕망은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지켜보라. 욕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재판관처럼 판단하지 말라.
Nicolo Paganini
Cantabile In D Major
James Last O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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