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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구름바람 산
명상 & 의식

명상에관한글 전편

by 고요한 강 2025. 2. 8.


명상에 관한 글 전편

4장
우리는 건물 내부에서 앞쪽에 위치해 있는 홀에 놓여 져 있는 탁자에 앉았다.
우리는 그곳의 문을 열어놓았으며 거기에 앉아 웅장한 산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우리의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친구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 마음을 관념들로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건 오히려 실재를 드러내는데 방해가 될 뿐이지.
너는 지금껏 모든 형태의 요가 수행 체계들을 거쳐 왔고,
마음의 발달 단계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어 왔지.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려는 일은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야.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 . . .

그리스도의 요가라 부르겠지만 이름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는 것이란다.”
“무엇보다 먼저 너는 시간의 문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단다.


시간을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지.
나는 지금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진실이란다.

시간이란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지
실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시간도 있지.
시각이라든지, 날과 주와 달과 그러한 시간 체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시간 체계는 약속을 잡거나 약속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이런 시간 체계가 없다면,열차 시간이나 배 시간이나 ,
어떤 곳에서 열리는 모임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이야.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이런 시간에 대해서는
'물리적 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란다.


자, 이와는 다른 성격의 시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마음의 시간이라 부르자꾸나.
마음의 시간은, 과거이자 미래이며 기억이자 생각이며,
언젠가는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등의

믿음과 관련된 시간이란다.
또 다른 표현으로 이것을 심리적 시간이라고도 하지.

자,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시간이란,
바로 이 심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야.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왜냐하면 ,
실재, 즉 시간을 벗어나 있는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는 ,
결코 깨달아질 수 없기 때문인 것이지.”

“기억이란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며,
네 생각이란 시간의 결과이며,
자네의 경험 역시 시간의 결과란다.”

“기억들,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기억이란 시간 속에서 네가 겪은 경험들의 결과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야기했던 모든 것들,
네 생각들, 네 믿음들 그리고
네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시간이란다.”

“너는 진리를 원한다고 하지만,
진리는 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며
또한 생각이나 믿음 또는 시간을 통해서도
결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지.
오히려 이러한 모든 것들이 ,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야.

이런 것들이 진리를 가리고 있는 동안에 ,
진리란 나타날 수 없어.
이런 것들이 벗겨지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라야
비로소 진리는 나타날 수 있는 것이야.”

“내가 몸을 입은 상태에서
칼림퐁에서 너를 만났을 때 너에게 주었던 ,
첫 번째 가르침은 명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나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루고자 한단다.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바르게 명상한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지.

요가를 처음 배울 때,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하고 ,
다른 생각들은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요가를 배웠을 것이야.
그런데 이런 방법의 명상으로는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
이제 네 앞에 증명할 것이란다.

이런 방법으로 명상했을 때
네가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네.
분명 어떤 결과를 얻기야 하겠지만,

진리란 결과가 아니거든. 이런 결과는 앞으로도 ,
정신적인 어떤 개념일 뿐이지 ,
진리는 결코 아니란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니?

“네,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였다.

그는 대답하였다. ,
“올바른 명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의 모든 과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단다.

자, 너의 생각이란 네 알고 있는 것들의 결과일 따름이지.
너는 네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면 내 생각이란
마음과 마음이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며,

생각이란 여전히 정신적인 개념이나 어떤 결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가?”
“예,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결론이나 생각이나 정신으로 만들어낸 어떤 것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고,
진리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다만 지금 존재할 뿐 ,
진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고, 
시간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추측할(speculate) 수는 있겠지만, ,
실재에 대한 생각이 실재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야.” 그는 말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네가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는 거란다.

자아(self)-자신(the me)- 네가 그걸 뭐라 부르든지 간에,
나(the I)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
실재는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자신(the me)-나(the I), 기억, 생각, 다른 것들도 모두 마음에 속해 있는 것들이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실재가 경험되기 전에 반드시 끝장이 나야만 한단다.”

“이제 너는, 집중을 통해 명상을 하고자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생각들이 정처 없이 떠돌며 서로 부딪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네가 중심 생각(central idea),즉 깊이 생각할 볼 ,
무엇인가를(thought to dwell upon)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상 배제(exclusion)란다.

그렇게 할 때 너는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야.
이렇게 하면 자신이 곧 실재를 찾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네.

게다가 너는 네 마음이 계속해서 떠돌게 된다는 것과,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에 마음을 유지시키려 할 때,
생각들끼리 서로 끊임없이 부딪힌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란다.

지금 나는 집중이 마음에 해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일에 관해서는 ,
집중은 그릇된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바른 결과(right ending)를 얻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바른 방법(right means)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왜냐하면 이 둘은 하나이기 때문인 것이고, 그렇지 않더냐?

“예,” 나는 말했다. “이제 저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
어떠한 생각도 일으켜서는 안 된단다
(do not be making ideas out what I am saying).” 

그는 말했다.
“네가 이해해야 할 본질이란, 마음의 모든 과정과 마음이
어떻게 생각들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것이란다
(the whole process of mind and how it formulates ideas).

"다시 묻겠다.” 그는 말했다.
“너는 왜 집중하려는 중심 생각을 선택하려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할 때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냐?
그래서 너는 특정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지,
너는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지만,
진리란 어떤 결과물이 아니야.
그러므로 집중이라는 방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이지.”

“네 마음 안을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그 안에서 자신이 선택한 생각과 ,
자신들을 표현할 기회를 얻고자 꿈틀 대는 다른 생각들 사이에서 ,
마찰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란다. ,

너는 특정한 생각에 집중을 하면서, 다른 모든 생각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통제하려고 한 적도 있을 테지.,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너는 진리를 밝혀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렇지 않더냐? 만약 네가 어떤 생각은 옳고 
어떤 생각은 그르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처 없이 떠도는 이유를 알아내야 하는 것이지.

마음은 왜 떠도는 것일까?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볼 수 있겠니?”
“글쎄요,” 나는 대답했다.
“그건 대부분의 생각들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모든 생각들에는 나름의 중요성이 있고, 나름의 가치가 있고, 숨겨져 있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들은, 마치 잡초처럼,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것이고, 그 것들을 잊어버리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것들을 더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끓어 넘치고 있는 주전자의 뚜껑을 억누르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네가 지금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네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그런데 그건 아직 내가 던진 문제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되지 못해.
각각의 생각들이 일어날 때, ,
네가 그것을 편견 없이 두려움 없이 
비난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또한 자유롭게 그것을 바라보되 ,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을 멀리 치워버리려하지 않고 ,
다만 그 의미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이 생각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란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은 결코 실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네가 이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렇게 자유로워진 마음은 고요해진단다.

그리고 이 고요함 속에서 실재가 드러나게 되지.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고, 
마음은 실재가 들어서기 전에 ,
반드시 고요해져야 한단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
자신의 생각들을 통제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
다만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무엇인가에 저항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집중은 마음을 협소하게 할 뿐,

그것은 마음을 자유롭게하며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이 되지 못한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명상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자신을 고립(self isolation)시키는 과정일 뿐이야.

그리고 자신을 고립시키려 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self-protection)하려는 것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음에 틀림없지.

자, 그렇다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이 실재인 것들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그 마음을 열 수 있게 되겠니? ,
“네가 정신으로 만들어낸 것들(your mental creations)을 조사하고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너의 생각과 기억과 경험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와 ,
그가하는 생각은 ,
결코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란다
(So there can be no separation between the thinker and his thought).

생각은
생각하는 자의 산물일 뿐이지(One is the product of the other).
생각하는자가 그가하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
분명히 이해하게 될 때, 너는 자유롭게 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이지.
생각과 생각하는 자 사이에서 ,
벌어지는 갈등은_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야.,
그 둘을 구분하는 태도가,
자신의 정신적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

이것을 자각하게 될 때(aware of),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 생각하는 자와 생각 사이에 있는 갈등도 있을 수 없게 되며,
다만 생각의 총체적인 과정에 대한 이해만이 있을 따름이란다.


그리고 생각의 총체적인 과정을 이해하고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자기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self-knowledge)이지.,
"지금 내 말을 이해하고 있니?”

“네.” 나는 대답했다.
“저는 이제,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자 사이에 존재하던
자기 분열이 끝장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자신에게 알려진 것(the known)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을 따름인데,
알려진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을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미지의 그것을 ,
마음이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때,
마음은 생각들을 마구 지어내기를 그치고,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에 스스로를 열게 됩니다.

편협한 마음은 보잘 것 없는(petty) 마음이며,
그 마음이 신에 대해 지어내는 관념도 ,
자신의 한계에 틀 지워져 있어 보잘 것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그는 내게 물었다“ 
네 마음이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지 않니?”

“네.”나는 대답했다. ,
“지금 이 순간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고요한 느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글쎄.”그는 말했다.
“진리란 시간에 속해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리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것이고, 
지금이 아니라면 그어디에도 없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 때가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고요해졌을 때라야 ,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란다.

마음이 강제적으로 스스로를 고요하게 만들려고 할 때,,
마음은 계속 갈등을 겪게 되지.
그러나 스스로를 이해함으로써 고요해지게 되면, 
그때 진리가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생각과 생각하는 자, 경험과 경험하는 자를 ,
둘로 나누어 보던 이원성(duality)은 존재하지 않고,
이원성도, 저항도 없는 상태 속에서 ,
경험하는 상태(experience)만 있을 따름이란다.

예수께서는 이를 이런 말씀으로 표현하셨단다.
‘내 안에 언제나 계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다.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며, ,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이성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신에 대해 이렇게 추리하고 ,
그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지:

신은 본성상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고,
그분은 모든 곳에 있어야만 하며, ,
그분의 실체 말고는 다른 실체(substance)도 없고,
그분의 생명 말고는 그밖에 다른 생명이란 없으며,
그분을 벗어나서는 어떤 창조성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은 무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reason)도 ,
반드시 멈추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 추론의 과정에서 조차 ,
마음은 여전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이성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은 여전히 기능하면서 ,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어서,
마음 너머에 있는 진리를 드러낼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이라 할지라도 ,
그것은 멈추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생각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지. ,

그러므로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명상의 시작이란다.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기술도,어떤 특별한 자세도, 
어떤 특별한 호흡법도 없단다

자신을, 곧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실재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라
실재성(reality)이 없단다. ,
이제 너는 이 점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그렇지 않니? 

나는 말했다.
;이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 이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자각(constant awareness)을 해야 한단다.

이것은 강박관념에 시달려 ,
스스로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비난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야. ,

이것은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수동적인 깨어있음이지
(just a passive alertness in which you see things as they are).

이렇게 할 때, ,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문제는 존재하기를 그치게 된단다

왜냐하면 네가, 다시 말해
마음(the you - the mind)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지.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오직 혼란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만이 ,
문제를 갖고 있을 따름이지. , ,
오직 실재만이 존재할 따름이고,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허상일 뿐이야. ,

이 완벽한 평온함(tranquility) 속에,
가슴과 마음이 멈춰버린(stillness)
이 상태 속에서 실재가 존재한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이며,
이 상태가 곧 아버지 자체이며,
그분 홀로 실재이시란다.

그분의 일(operation)은 ,
드넓고, 광대하며, 무한하고 완벽하단다.

그는 말했다.명상을 할 때에는, ,
어떤 방법도 어떤 체계도 필요하지 않단다.
방법이나 체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양식(pattern)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진리는 양식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Truth is not a pattern).

명상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닌 자유로움 그 자체이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자유가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네 스스로 시간을 갖고,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
하나하나 살펴보려무나(discern).

명상을 하는 가운데,마음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따라서 이제 더 이상 마음은 휩쓸리거나 결과를 얻기 위해 분투하기를 멈췄다.
그때 나는 실재가 그 순간(now)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시간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이제 시간을 넘어서 있는 ,
그것(the Timeless)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때 ,
마치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이
스스로를 한껏 표현하도록 ,
나를 내맡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 때 감각(sensation)은 ,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종 방해가 될 뿐이었지만,

내가 누워 있던 침상 위로 ,
내 몸이 떠올라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제 내가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진리는 즉각적으로(immediate) 존재하지만,
시간에 속해 있지는 않다는 것과

수세기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모은다 하여도,
기억은 실재를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제 아무리 탐구한다 하여도,
억겁의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
실재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는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시간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내 마음의 산물이었고,
내 마음은 시간의 산물이었다.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지적인 말과 개념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마음의 높은 차원이든 낮은 차원이든
그 모든 측면들을(all the phases)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마음이 생각해낸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내 마음이 지껄여대는 것을 비로소 그치게 되었을 때,

내 생명(my livingness)이 드러났으며,
그 유일한 실재가 바로 나의 생명(Livingness)이었고,
그것은 기억도 관념도 아닌 그 무엇이었다.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실재를 시간의 틀 속에 넣고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To know what is was would to put it in time, and that was impossible).

이제 나는 주(the Master)를 이해할 수 있었고,
왜 그가 비유로 이야기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왜냐하면 그이 역시도,다른 이들에게 ,
실재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모든 이는 자기 힘으로 ,
홀로 그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요가이며, ,
모든 요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요가이다.

그대가 그리스도의 요가에 이르게 될 때
그대는 자기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사라져버리고 ,
그것은 더 이상 실재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영원하시며, 유일한 실재이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왜냐하면 문제들은 자신이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이 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원인이란 바로 자아(the self)이다.

자아란 보다 높은 지위와 힘을 얻기 위해
음모와 탐욕과 욕망이 결집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자아가 존재하는 그 근본 원리는 분리(separation)에 있으며,
이 분리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
그대 자신이 문제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비난하고 모든 사람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조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는 것은 환상일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라야 문제는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우리 자신이 곧 문제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자아의 모든 기억, 경험, 탐욕, 시기, 욕망,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 관념과 이상들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는 자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그저 생각으로만 주위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not merely thinking around them)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때에, ,
문제의 원인인 자아가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일어나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내 변화 상태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는 직접, ,
나에게서 나오는 이전보다 훨씬 밝은 빛을 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의식적인 자각(consciously aware)의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나도 의식적인 자각을 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자아의 바깥에 존재하는 신학적 개념(concoction)이 아니라,
자아라는 사탄(the satan of self)이었다.

자아는 언제나 앞에 나서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그대가 생각의 과정을 자각하고 있다면,
언제나 앞에 나서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로 자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자아를 알게 되면(know),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자아로부터의 자유가 찾아온다.
내 뒤로 물러서라. 사탄아.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버지 홀로 실재이시다.
그렇다. 자아가 바로 자신을 속이는 핵심 요소이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친구의 지혜는 완전했으며, ,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
그 자유는,어떤 자극이나 ,
자기 최면(self-hypnosis)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
다만 이해를 통해 오는 자유였다.

점심을 들고 난 후, 우리는 등산화를 신고, ,
니이블룽 리충(Nyiblung Richung) 계곡으로 올라갔다.
그 계곡은 우리가 있던 곳의 정면 오른편에 있던 것이다. ,
이 계곡에 있는 빙하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몇 마일 이내에 있었다. ,

우리는, 이 거대한 얼음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만들어내는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빙하의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대, 우리는 거대하게 갈라진 틈들을 보았는데(crevasses),
말 한 마리가 지나가기에도 충분한 크기였다.많은 산들이 잠사르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내 친구는 다양한 봉우리들을 가리키며 그 높이를 자세하게 말해주었는데,
20000~24000 피트(6096-731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혀 꾸미지 않는다.
어떤 서구인도 눈길을 둔 적이 없던 그 아름다움을 말이다.
예수께서는 들에 피어있는 백합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영화를 입은 솔로몬도 여기 있는 이 꽃들 중 하나보다도 차려입지는 못했다.”

내 친구는 여기 있는 산들을 올라갔을 때의 경험들을 좀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성취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최고의 등산 코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나 역시 거기를 오를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꼈는데, 이제껏 나도 등산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기억하기로는, 알프스 남쪽을 하산할 때, 
나는 지름길을 찾아 빨리 내려가야지 생각하며 길을 찾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길로 내려가다 보니 도저히 내려가기에는 불가능한 곳에, 
얼음과 암석의 절벽의 낭떠러지에 내가 서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되돌아가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염려하게 만들었다.

난관에 부딪힐 때의 느낌은 
직접 그것을 겪어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저 봉우리는 높이가 얼마나 되지요?” 나는 물었다.
“2300 피트(7010m)란다.” 내 친구는 대답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 곳을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물었다.
(등산에 대한 욕심이 다시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아니.” 그는 말했다.
“이 봉우리는 이제껏 그 누구도 오른 적이 없다네.
몇 몇 사람들이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지.”
“그렇다면 저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말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는 시도해볼 수도 있을 걸세.”
이제까지는 등산가들의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던 높이 솟아오른 그 봉우리에
그도 역시 도전해보겠다는 시선으로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는 대답했다.

내려오는 길 내내 내 마음 안에서도 도전하고픈 생각이 계속해서 솟아났다.
나는 말했다: “6인치 망원렌즈가 장착되어 있는 내 카메라를 들고 와서
그 봉우리 사진을 많이 찍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는 돌출되어 있는 곳(spur)을 찾아내서
그 버섯모양으로 생긴 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의 쌍원경을 통해서 정상 부분이 버섯 모양처럼 생겼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버섯 모양으로 생긴 그 부분 위로 어떻게 올라서느냐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었다.

“저것 때문에 이제껏 시도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패한 거라네.”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꼭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욕구가 더 강해졌다.
나는 그대가 등산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등산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의 피부 밑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대를 사로잡는 충동이 되어 계속해서 산에 오르길 시도하고 또 시도하게 만든다.

그 날 저녁에 해가 지려고 하자 우리는 돌아왔고, 햇빛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을 등지고 산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자 핑크빛을 띠던 구름의 색깔이 점점 더 어두워져
마침내 어두운 자주색으로 변했다. 색깔이 변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점점 더 많은 구름이 계곡에 모이기 시작했으며, 구름은 산허리를 따라 서서히 기어오르며 점차 산을 덮더니
마침내 눈으로 덮인 정상만 남게 되었다. 산 정상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며 무지개의 온갖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해갔으며, 반짝이는 별들이 나타나,
마치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둥근 지붕(canopy)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리고 구름은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들을 잠재우려는 듯 자신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참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를 먹었다.
계곡을 따라 산책을 하고 난 뒤라 나는 배가 고프기도 했고,
신선한 공기가 내 식욕을 돋구어주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고 난 뒤,
내 친구는 그의 등산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사진에 담겨진 모습들은 너무나도 특이하였고 나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전에 찍었던 사진들과 함께 그 사진들 중 일부를 가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 흐른 후, 나는 그의 말을 다시 듣고 싶은 열망에, 
오늘 저녁에 더 공부를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 내가 하루에 할 만큼의 양을 충분히 했다며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내일 아침 자네가 원기를 회복하면, 우리의 일을 새롭게 다시 할 걸세.”
우리 둘 사이에는 참으로 친근함(real affinity)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단 한순간도 심기가 불편했던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친척과 가까이 있을 때조차 가끔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조화로움을 넘어선 조화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것은 내내 이어졌다.

뭐가 있었으면 하고 내가 바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이루어졌다.
그의 소망은 나의 소망과 언제나 일치했으며, 내 소망도 그의 소망과 항상 일치했다.
그의 심오한 지혜는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쉽게 인도해주었으며, 나는 그를 점점 더 흠모(love)하게 되었고,
그의 심오한 이해에 감탄하곤 했다.

우리는 쌍둥이 영혼들(twin souls)이었으며,
내가 그에게 이 느낌에 대해 말하자, 그는 대답하였다. 
“아들아, 그래서 내가 너를 택한 거란다.” 
그토록 위대한 현자(master)로부터 지혜를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이 나와 같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그날 밤 피곤하였으며, 징이 울리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서는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징을 울리는 규칙적인 관습이 있었다.

5장

날씨는 그날그날 아침마다 달랐다.
계곡에는 밤새 비가 내렸으며, 산은 더욱 더 많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안개가 얇게 깔려 있었으며, 신선한 바람이 그것을 불어내고 있었다.
햇살이 안개 사이를 통과하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아침은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의 아침과 비슷했다.
이곳의 산들이 훨씬 더 크고, 모가 더 심하게 났으며, 경치가 보다 웅장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내 친구는 이미 마을에 내려가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모든 이는 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며,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 조언을 그에게 구했다.
그들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를 일찍 시작하셨네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찍, 한 새벽 3시 정도에, 이장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는 것을
돕고 왔다네. 쌍둥이 둘 다 건강하다네. 이틀 안으로 그녀는 또 출산하게 될 거야.” 이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삶 안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면을 발견하였고, 다방면에 걸쳐 있는 그의 능력에 경탄하였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네가 주변에서 보고 있는 아이들 중 대부분은 내가 직접 받은 아이들이지.
그래서 이제 애를 받는 데 있어서는 꽤 전문가가 되었네.”

“아침은 들었나?” 그는 물었다.
“아직요.” 나는 대답했다. “이제 막 일어나서, 면도하고 씻고 연못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연못은 온천에서 나오는 물로 꽤 따뜻했었다. “실은 스승님(you)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승님(you)이 어디에 가셨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렇구만." 그는 대답했다. 나는 오늘 새벽 2시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서 마을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러 갔다네.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어.”
나는 말했다. “티베트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는 말이라네.”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네.
갓난아이 때 죽는 아이는 거의 없다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수를 보아하니,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게 다 스승님께서(your) 치유하고 사랑하시는 놀라운 재능을 갖추신 덕분일 것입니다.”
“어서 아침이나 같이 드세.” 내가 칭찬하고 감탄하는 것을 막으려는 듯 그는 말을 꺼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모든 사람 안에 신의 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안에서
神의 靈은, 종교의 교리나, 믿음과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들로
막혀 있었다.

“그대가 이해하기만 한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보다 더 큰 일들도 하게 될 것이야.”
그는 말했다. “이와 비슷한 말이 거의 이천년 전에도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도 사람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단다.
그 이유는 주로 사람들이 눈먼 이들을 모방하기 때문이지
(mainly because they are imitators of the blind).

“어떤 형상도 숭배해서는 안 된단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만든 돌이나 나무나 사람의 형상을 숭배해서도 안 될 것이야.”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자네를 실재로부터 먼 곳으로 이끌게 될 것이야.
자기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야.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을 통제하고, 속이고, 착취할 뿐이지.
사람들이 스스로 눈을 떠야만, 
이 노예 생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거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오늘 아침으로 우유 한 잔을 먹을 수 있다면,
오늘 아침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거 좋지. 내 아들아, 곧 먹게 될 거야.”야크의 젖은 유지방이 풍부하며, 더껑이(cream) 가 특히 맛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침식사로 대부분 보리죽(porridge)과 우유를 함께 먹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아침에는 다만 우유 한 잔이면 족했다. 아침을 들고 나서, 우리는 그곳을 빠져 나와
산을 마주보고 있는 앞쪽 홀(front hall)로 들어갔다. 그 웅장한 장면 앞에 서서 풍치를 느끼고 있노라면,
나는 항상 마음이 예민하게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는 너에게 희망(hope)에 대해 말하려 한단다.” 그는 말했다.
그때 그는 나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그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망이란
불안(uneasiness)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지.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희망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야.

성서의 잠언 17장 10절에서 한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지.
‘현명한 이에게 하는 한 마디의 꾸짖음이 
어리석은 이에게 하는 백 번의 채찍보다도 낫다.’
현명한 이는 잘못을 알아차리고 인정하지만(recognize),
어리석은 이는 잘못을 반복한단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외적인 안전(outward security)을 구하고 있지.

그러나 바깥에서 어떤 불안함이 있다면,
내면의 마음에도 언제나 불안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또한 내면이 불안해지면,
바깥에도 불안함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단다.

왜냐하면 내면(inward)은 언제나 자신을 바깥으로(outwardly)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인류는 희망이라는 철학을 발전시켜 온 것이란다.”
“이제 희망에 매달려 살고 있는 사람은
사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에게 보여 주련다:
그렇게 할때 그는 살고 있는 게 아냐. 

왜냐하면 그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이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what is now)이 아니거든.
그러므로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전혀 살고 있는 것이 아니지.

그는 미래의 어느 곳에선가 살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미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란다.
지금이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네가, 존재하지도 않는, 어제나 내일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거든.
만약 네가 미래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면,
너는 다만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을 따름이야.

그때 생명(Life)이란 개념에 불과한 것인데,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 환상일 뿐이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지.
그들은 어떤 불안(disturbance)도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있어.
왜 그럴까? 그건 너무나 단순하게도, 그들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 너 역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너는 반드시, 왜 자신의 마음이 불안한지 알아내야 할 것이야.
그렇게 한다면 왜 자신이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있는 지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사실 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는, 뭔가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상당히 두려워하지 않았더냐? 그건 네가
생각(thought)과
생각하는 자아(thinker)가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지(distinct) 못했기 때문이란다.

또 너는 자신의 생각을 바라볼 때
마치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듯이 바라보았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너는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

그러나 이제 너는,
생각이 생각하는 나를 창조하여
마치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듯이 믿게 만든다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그 생각을 중심으로 맴돌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But now you see that the thought creates the thinker and the thinker thinks around it).


이렇게 그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거란다.”
“너는, 자신을 조건 지우고 있는
이 모든 생각들을 벗겨내야 하는데,
이는 그 생각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함(seeing)으로써 가능하단다.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지? 나에게 말해볼 수 있겠니?”

“음.” 나는 말했다.
“생각은, 기억과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것이 물려받은 것이든 직접 자신이 습득한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지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자아는 반드시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야(discern) 한단다.
자아와 생각은 하나이고 사실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평온함이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너는, 자아에게는 그 어떤 실재성(reality)도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자아란 그저 기억과 경험의 다발일 뿐이고,
자신을 끊임없이 생각의 형태로 투사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자아는 스스로의 생각과 경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이것들이 바로 마음을 구성하게 되는 거란다.
이제 너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속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이것을 분별(discerned)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너는 두려움을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희망과 두려움은 둘 다 마음 안에 있는 것들로서, 
대립되는 짝들(opposites)이란다.


마음이
이 둘의 대립으로 혼란스럽기 때문에
항상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ever-present) 실재가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이지.
이러한 조건이 남아있는 한,
살아있는 현존(Living Presence)은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란다.”

“과거와 미래가 이해를 통해서
현재 안으로 녹아 없어지게 될 때,
거기에는 평온함이 깃들게 되고,
그 평온함 안에 바로 실재,
즉 창조적인 대생명(the very livingness)이 있는 것이야.

창조성이란 언제나 현재 속에,
지금 안에 있는 것이지,
미래나 과거 속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너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예.” 그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말했다.
“지금 제 마음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제가 갖고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저 스스로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무런 비판이나 검토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들과
무엇이 영적이고 영적이지 않은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러한 것들이 단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떤 생각은 두려워하고
어떤 생각은 검토하지 않은 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성(spirituality)은
사랑(Love)이자 지혜(Wisdom)이며 친절(Kindliness)입니다.
마음 내부의 갈등이 이해를 통해서 사라질 때라야,
사랑과 지혜와 친절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이제껏 너는 숱하게 단정들(conclusions)을 지어왔고, 그것들을 자기 주위로 쌓아올렸단다.
이제껏 너는 이렇게 내린 결론들(conclusions)을 이해라 불러왔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제 너는, 이러한 결론들이 참된 이해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것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방해물이 될 뿐이지.”

“그동안 너는 두려움에 떨면서 종교 예식에 매달려 왔고,
예식을 통해 두려움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조건에 더 갇히게 될 따름이었지.
네가 내린 결론들은,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 되었고,
결론들을 내릴 때마다 자신의 주위에 더 많은 벽을 쌓아올리는 것이란다.

너는 스스로에 의해 묶여 있고 갇혀 있었던 것이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너는 관념이라는 벽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그것들끼리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하고, 새롭게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할수록 더 큰 혼란만 만들어낼 뿐이었지.

그런데 사실 그 혼란은, 두려움과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면서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아가 투사된 것일 따름이야.
자아를 이해할 때에만, 자아에 일어나는 일들을(what the self undergoing)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스스로를 가두는 이러한 조건들은 사라질 수 있단다.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자아는 자신이 만든 환상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거란다.”

“자아란,
다만 기억들과 경험들과 제한들과 믿음들과 적응기제(conformities)들의 다발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러한 자기 폐쇄(self-enclosure)를 벗어나게 하는 자유가 찾아온단다.
자아가 왜 자신이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의 동요는 정지하게 된단다.
그리고 이 고요함 속에 실재가, 생명(the Life)이 있다네.
그 생명은 영원하며 드넓고 무한정 자유롭게 기능하고(operation) 있지.

일단 의식이 자유롭게 풀려나면,
의식은 자신이 시간과 기억과 경험과 과거와 미래의 환상을 받아들일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자유로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현재를 순간순간 살아가는 그 찰나에서만
자유는 존재하는 것이란다(only in living in the present is there freedom).

그러므로 생각의 환상을 순간순간 알아볼 때,
환상은 본래 무(無)의 상태로 사라져버리고,
이러한 알아차림(awareness) 속에서 실재는 그저 있게 될 따름이지.
그리고 바로 여기에 창조성(the Creative)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란다.”

“자아가 스스로에게 묶여있을 때,
자아는 자기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하게 되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에 묶여 있는 자들이, 결코 신을 알 수 없게 되는 이유라네.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을 말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바깥에 있는 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들은 결코 신을 알 수 없을 것이란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자들, 
그들도 역시 다른 형태의 믿음을 갖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이 믿음도--
역시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믿고 믿지 않고는, 조건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거든.
믿음이란 자아에게 알려진 것, 자아가 알고 있는 것의 결과란다.
믿음 역시 알고 있는 것, 기억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거든.
하지만 기억은 결코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단다.”

“그렇다면 기억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겠지.
‘그래, 나는 신을 알지 못해.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엇이지.’
이렇게 기억은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개념으로 창조하고는,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한 개념을.. 믿어버리게 된단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고,
그저 정신으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너는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마음이 자신이 지어내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비로소 알려지지 않는 것이 발견될 수 있는 거란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바깥을 통해서는 오지 않는 거란다.”

“이제 분명히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들을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자아는 그 결론들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자아의 중심 이미지가 되어 버리고,
자아는 환상 속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눈이 멀게 됩니다.”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결론과 자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해방(release)과 변혁(transformation)이 찾아오고,
모든 결론들은 단번에 떨어져 나간단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한없이 유연해지는 것이고,
이렇게 한없이 유연한 마음 안에서만 실재는 발견될 수 있는 것이란다.”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나면,
우리는 그 결론들로부터 결심들(resolutions)을 세우게 된단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결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결심이란 그저 욕망을 억누르는 것뿐이란다.
그리고 욕망을 억압할 때, 그 욕망에 대한 이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현재 속에서 깨어 살피다 보면, 너는 각기 다른 마음의 층(layer)으로
자신의 가지들을 뻗고 있는 마음을 보게 될 것이란다.
바로 그때 자아가 움직이고 기능하는 방식(the ways of the self)이
발가벗겨져 드러나게 된단다.

높은 차원(layer)이든 낮은 차원이든,
질투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의해 묶이게 될 뿐이야.”
“피상적인 차원의 시기심에서부터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적,영적 차원의 시기심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에는 방해가 될 따름이라네.”

“창조성이란 존재의 상태이므로,
제 아무리 생각을 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야.

창조성은
거짓된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스레 일어나는 변혁의 결과물인 것이지.”
“우리는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반응을 살핀다면(watch),
우리는 자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각하게 될 것이란다.

너는, 자신이 보이는 각각의 반응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억,
두려움, 허영심, 탐욕, 저항, 수용, 믿음 등등의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란다.
네가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자신이 나타내는 이러한 반응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자기-이해이며,
이것만이 홀로 자신을 자유로 이끈단다.”

“이러한 앎을 통하여
네 마음에 떠오르는 각각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피고, 알아차릴 수 있다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자신(as you really are)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거나,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스스로를 판단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그러면 그때 거기에 창조되지 않은 실재가 존재하게 된단다.
그때 자아란 오간데 없고 다만 아버지 홀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지.
아버지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들(all creation) 배후에 계신 유일한 지성(the only intelligence)이시며,
지금 안에서 영원한 현재(ever-present)로서 모든 곳에 계신단다.”

“이제 네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단다.
그러면 너는, 다른 이들의 생각에 의해서,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조건화되어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받아왔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진리를 알기 위한 도구(instruments)가 되지 못해. 오히려 정반대이지.
유일하게 자신 안에 창조성을 품고 있는 실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제껏 자신이 받아온 그 모든 영향들과
자신이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매우 세심한 부분까지도 알아차려야만 한단다.”

그제야 나는 그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참된 영향력(True influence)이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아 자유로운 영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기계적으로 나를 표현하게 내버려두는 대신,
사랑과 지혜 자체인 실재가 나를 표현하도록 내맡기게 되었다.

이 안에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품고 있는 
엄청난 힘이 존재했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었다.

“네.” 나는 말했다.
“이제 저는 세계가 왜 혼란스러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의 혼란을 없애는 그 작업은
나와 너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단다.
혼란의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된단다.”

“네.” 나는 말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창조성(Creativeness)은 경험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모순과 한계와 더불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라야
비로소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 너머에 있는 그것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무한하신 ‘하나’(Infinite ‘One’)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인가로 되고 싶어 하는 욕망(desire)이 있을 때,
어떤 결과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desire)이 있을 때,” 그는 설명해주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모순(contradiction)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모순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고요한 마음이란 있을 수가 없지.

그런데 고요한 마음이란
생명(Life)의 중요성을 총체적으로 깨닫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러므로 시간의 결과물인 생각(thought)은,
영원한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깨달을 수 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which is beyond time)을 알 수가 없다네.

생각의 본성은
과거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현재(Living present)를 충분히 자각할 수 없는 것이야.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완전하게 자각할 수 없는 것이지.

- 왜냐하면 시간의 산물인 생각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자신과 모순되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직접 창조하고 있는 그 모든 문제들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생각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그저 추구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생각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생각과 생각하는 자(the thinker and the thought)가 동시에 끝장이 나야지만,
실재는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거란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래서 만약 제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소위 영적이라 부르는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저는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군요.
또한 제 자신이 스스로를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하는 행위의 원인이라는 점을 알겠습니다.
나 자신 바깥에 있는 행복을 추구하게 될 때,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영적이든
어느 차원이든 상관없이, 나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자(explioter)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런데 착취하는 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연의 변덕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그 착취자는 다만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만족을 얻고자 한
내 욕망들(demands)이 모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이 날뛰는 곳에서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착취자는 만족을 느끼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나 결코 그것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는 좀 더 살펴봐야 할 미묘한 문제가 있단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저항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이지.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악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악(the evil)을 파괴시켰다고 생각한단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이 사회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써 악을 없애려 한단다. 그러나 그들은 악을 더할 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도 악을 창조하는 일에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릇된 방법으로는
결코 올바른 행동이 자리 잡히게(establish)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살인자들을 그저 똑같이 죽인다고 해도 평화는 결코 오지 않는단다.
그렇게 한다면, 너 역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이거든.
우리가 서로를, 집단에 따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에 따라, 서로 다른 사상에 따라
편 가르기를 계속하는 한,
거기에는 언제나 공격하는 자들과 방어하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리고 방어하는 자들은 기회가 되면 공격하는 자들로 변할 테고.
그동안 무지와 전통에 따라서,
자신이 직접 습득한 지식에 따라서,
사상에 따라서, 다른 이들을 추종하는 것에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묶이게 되었고 어떻게 조건화되었는지를
사람이 스스로 알아보기 전까지는,
평화와 자유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악은, 또 다른 악으로써도,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결코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더욱 더 공격적으로 변하고, 더 많은 악이 생겨날 뿐이지.
이러한 분열(division)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평화는 사람과 세상에 깃들게 되는 것이란다.

악 혹은 다른 무엇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 결과로 평화가 올 수는 없는 법이지.
또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도 결코 오지 않는 것이란다.

평화는 오로지, 전쟁의 원인들,
즉 공격성, 민족, 서로 다른 종교로 나누는 태도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이해되고 나야지만,
찾아올 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 그것들은 사라질 수 있단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며
다만 영원하고 항상 현재에 머물고 있는, 사랑-신-평화가 들어서게 된단다.
너는 평화를 창조할 수 없단다.

사랑-평화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 통일성(unity) 기초 원리이자,
지금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내가 바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이다.
나 말고는 다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I am the Only "One", there is none besides Me)”


“영성(spirituality)이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그 안에는 어떤 차별도, 
어떤 분열도, 지위나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욕망도 없단다.
무지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롭게 남아있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모방이나 전통
또는 자신보다 모르고 있는(less informed)
권위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만의 생각의 자유로움을 지속시켜(maintain) 나가야만 한단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나무는
이기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자신의 환상과 두려움과 모순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얽혀 있는 가지들이 뻗어있는 것에 지나지 않단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무책임하게 변하지.
이로써 더 큰 혼란과 무질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란다.”

“이해와 조정(adjustment)을 통해서 나오는
의식적인 행동은 순수한 생각(pure thinking)에 이르게 한단다.
또한 순수한 생각은, 더 이상 그 어떤 공격성이나
이기심이나 미움이나 살해도 그 안에 품고 있지 않는,
순수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지.

그때야 비로소 언제나 현재에
그저 있는 현존에 대한 깨달음(realisation of the Presence that is Ever-Present)이 깃들게 된단다.
그리고 그것 안에는, 어느 경우에라도 결코 자신을 개인, 민족, 집단 따위 등으로 나누어
대립되게 하는 성향을 그 안에 품고 있지 않단다.”

“너도 곧 선과 악이
그것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란다.
그것들은, 우리 행동들의 결과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말들에 불과하지.”

“그리고 사실 우리의 이런 행동들은
우리의 생각의 방향성(character)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
그리고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이런 생각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자아의 무지 때문으로서,
자아가 스스로 그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슬픔과 갈등을 없애는데 있어서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paramount) 일이란다.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이란 실재가
있는 그대로 표현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의식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단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임무이며,
달콤한 말이나 생각으로 사람들의 무지를 지속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란다.
믿음이란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 뿐이야.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만이
마음을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단다.”

“현상 그 배후에 있는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마음,
비난이나 반대, 애국심, 종교의 형식, 정치의 속임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마음,
인류가 어떻게 조건화되어(conditioned) 왔는지를 살펴보는 마음으로,
이러한 조건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 그것들은 떨어져 나가버린단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그 마음 안에
참된 영감이 떠오르게 되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란다.”

“기도할 때,
신과 자신이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단다.
또한 영감을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단다.
행여나 그렇게 한다면 너는 분리의 환상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란다.
다만 하나의 생명만이 있다는 것과
이 생명은 너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네 형제들과 자매들 안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자기는 무한하신 이의 어떤 부분이고,
다른 형제는 다른 부분이라는 식으로 그 생명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단다.
하나의 생명(One Life)은 그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하나의 몸에 수많은 장기들(members) - 심장, 폐, 간, 신경조직, 뼈, 손, 발 등은 다 그 안에 있지만,

몸은 하나일 뿐이지.

또한 하나의 피만이
하나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members) 사이를 순환하며
영양분을 공급해주고 있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민족들도 모두 다 같이,
하나의 몸 안에 있는 같은 구성원들(members)이란다.

그리고 그 하나의 생명은 모두 안에 깃들어 있지.”
“네가 거짓인 것(what is false)을 다 이해하고 나면,
그때에 비로소 진리가 있게 된단다.

진리 이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단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지.
거짓인 것은 진리 안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진리 안에서는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분리는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야.”

이 말과 함께 그는 말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나 역시 침묵했다.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제대로 듣는 법(art of listening)을 배웠다.
나는 그이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해
생각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다만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내 안에서 변모(transformation)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들었다.

이제 나는 이런 자기-이해야말로
지혜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과,
자기-이해 없이는 어떤 지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는 온 존재를 뒤흔들어놓는
이야기(inspiring talk)를 들으면서
다만 말없이 가만히 있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들은 내용을 그대로 기억해서
되풀이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 들은 내용이 앞으로의 그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그런 경험을 말이다.


거대한 변화가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그 변화와 함께 결코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sense of freedom)이 
온 존재를 휘감게 된다.
이것이 내가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바이며,
그 해방감은 언제나 신선했다.
나를 묶어 놓았던 과거라는 사슬은
계속 헐거워지며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now)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만이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깊은 침묵 속에 실재가 있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으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힘이 바로 그 순간(Now) 존재했으며,
그 힘이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현재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들에게 더 중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희망이란? 
언제나 미래의 어느 곳에 놓여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라는 시간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대의 삶(Livingness)은 결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현재 속에 있을 뿐이다.

지금만이 창조적이며,
유일한 바로 이 순간이며,
언제나 새롭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존재하며,
지금 안에서 기억은 녹아 없어지고,
사랑이 유일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 그대도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너무나 경이로워 다시 붙잡고자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순간을 다시 잡으려할 때,
그대는 지금 이 순간을 결코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지나가 버린 순간은 이제 경험이자 기억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그대의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창조적이고,
창조성 자체이며,
매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분리도, 국가나 민족도, 서로 다른 종류의 교리도 사라지게 되며,
유일한 실재인 살아있는 현존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만물의 아버지이신 신이다.
그리스도의 요가는 다른 모든 요가들보다 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all-incrusive),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며,
지금, 다만 지금 존재한다(exists NOW, ONLY NOW)!
신은 그분의 완전함 속에서 지금(NOW) 존재하다! 지금!
그리고 그분 홀로 계신다!

그대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실재 안에서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은 다만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이것이 사람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이다.

그대가 자아를 알게 될 때,
이미지와 믿음, 관념, 분리, 숱한 어제와 미래,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환상들 등 이 모든 것들이 온통 뒤섞여 있는 마음을 알게 될 때,
결코 비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하지 않고 이 사실을 보게 될 때,

마음은 자신의 내용물을 넘어서기 위해
생각을 지어내는(fabricate) 것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며, 그 환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알지 못하며,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이란 실재에 대한 생각들(ideas) 뿐이지만,
마음은 그것을 실재라 믿고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생각은 신이 아니며,
“신”이라는 말 자체는 신이 아니다.
신은 다만 영원하며, 그분의 완전함 속에서 항상 현재에 있으며,
그분이 유일한 하나이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비로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은 혼자 분투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오직 그때에만, 지금 속에 존재하는 실재가 있게 된다!
이때 그 실재는 오직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미래, 그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대는 이것을 스스로 경험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대를 위해 그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어떤 선생이나 영적 지도자(guru)의 도움도 받지 말고,
그대는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홀로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대는 알려진 바 없는 그곳(the Unknown)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 말고 다른 길이란 없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바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스스로 직접 보고 이해한 바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인 것이다.

알려진 바 없는 그것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선생이란 방해물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선생이 있는 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항상 있기 마련일 것인데,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경험하는 자(experiencer)와 경험(experience)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는 영원한 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전적으로 부적합하며,
내 말은 결코 알려진 바 없는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을 따름이다.

진리는 결코 이용될 수 없다.
진리를 세상의 일에 이용하려는 욕망을 갖고, 진리에 접근하는 순간
그대는 진리를 잃게 되며, 그대와 진리는 분리가 되는 것이다.
그 때에는 자신(the you)이 있고, 진리가 있어 서로 분리되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진리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때,
그때 진리는 그저 있게 된다.

그대는 진리를 마치 삽이나 곡괭이처럼 이용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그대가 진리보다 더 크고 위대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다만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사용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고
다만 진리가 스스로 일하도록 내맡긴다면(allow),
진리는 그대의 삶과 그대가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일하는 그 영역은 드넓고, 무한하고, 광대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its operation is wid, unlimited, extensive).


진리를 어떤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지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 지적 행위 안에는 기억,
분리, 선과 악, 마음이 지어낸 모든 환상,
미움, 시기, 적대가 있을 따름이며,
이것들은 자아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진리가 그대 안에서,
그대를 통해서, 마음의 방해를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게끔(operate) 그것을 내버려둘 수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중에 진리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곳까지 드넓게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힘(effect)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진리, 알려지지 않은 바의 것, 신 등 무엇이라 부르는가에 상관없이 말이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은 결코 그것을 이용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대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진리는 스스로 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일하는 그 영역은 광대하고, 드넓고, 무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 언제나 현존하는 무한한 생명의 힘과
영광과 자유와 최상의 행복이 놓여 져 있다.

“나는 너희에게 참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신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가 복음 18장 17절)

6장

우리는 둘 다 모두 참된 명상의 상태에 있었다.
그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도로 젊어졌음을 느꼈다.
나는 전보다 훨씬 더 젊어졌음에 틀림없다.
내 친구도 그가 느낀 바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참으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구나.
훨씬 젊어진 것 같아.” 나도 이를 느꼈다.
이전보다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보다 민첩해지고(alert)
명료해진(clear)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실재가 나를 통해 기능(function)할 수 있는,
보다 좋은 도구가 되어 있었다.

실재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삶의 안내자로서
더 이상 내 지난 경험이나 기억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 자신 바깥에는
사실상 그 어떤 안내자도 없었고, 그때 내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었다:


“내 아들아, 너의 유일한 안내자는 알려지지 않은 그것, 
창조되지 않은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단다.
아직은 내 경험이 네 경험보다 훨씬 더 많기야 하겠지만,
내 경험으로도 이제 너를 안내해줄 수 없단다.
너와 함께 있고자 하는 진실한 내 마음만이,
네 가슴이 원하는 바를 줄 수 있을 거란다.

그러나 너를 인도하는 그 소리는 내면에서 온단다.”
“장차 우리는,
아직은 명쾌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함께,
스스로의 자아에 대해 자유로운 상태에서(impersonally), 토론하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우리 둘 안에 있는 생명(Livingness) 자체이신,
신의 사랑과 지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드러나게 될 것이란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은, 바로 우리 둘 안에 계신 신의 생명이지.
주(the Master)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안에 언제나 계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란다.
자아란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신 홀로 살고 계시는 거란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은 방해물이 될 수 없는 거란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앞쪽 홀에서 죽 있었으며,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말했다:
“저는 그동안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점심으로는 그냥 우유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둘 다 점심으로 우유를 마셨다.

우리는, 내가 앞으로 세상에 나가 해야 할 일들과
앞으로 내가 다녀야 할 지역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미국, 캐나다,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중국, 일본, 중동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치유는 참으로 놀라웠으나(phenomenal),
그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분명하게 배운 바이다.
그래서 나는 나 좋을 대로 한 것이 아니라
영(the Spirit)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갔을 따름이다.

점심 식사 후 나는 니블룽 리충 산 정상을 오르는 것에 대한 화제를 다시 꺼냈다.
그 산은 우리를 정면에서 마주보며, 우리의 도전을 권하고 있는 듯 했다.
“음.” 내 친구는 말했다. “그렇다면 정비(arrangement)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단다.
우리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시도를 하기 전까지,
너는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제 나도 충분히 알겠다.

일단 우리에게는 좋은 짐꾼들이 필요하단다.
세상 그 어느 곳에 내놓더라도 손색이 없을, 좋은 짐꾼들이 많은 지역에 가서
그중에서도 좋은 짐꾼들을 택해야 하지.
우리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산을 오를 것이란다.
그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최소 10일은 걸릴 거란다. 우리는 올라가는 길에 캠프도 몇 개 마련해야 할 것이야.
등산용 밧줄과 도르래(tackle)도 필요한데, 그것들은 다행히 이곳에도 있단다.
그 산을 오르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하지.

그렇지 않는다면 곧 겨울이 들이닥칠 테고
그러면 성공할 가능성은 아예 없단다.
눈이 엄청 쌓이거든. 또 폭풍우의 위험도 있는데,
그건 엄청 사납고 일단 불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지속되지.
이런 악조건 중 하나라도 걸리게 되면, 산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이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란다.

또 우리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등산 때문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내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inquiringly)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스승님(You)께서 저에게 해주신 좋은 이 모든 일들이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는 말했다. “만약 버섯 모양으로 솟아오른 저곳을 지나갈 수 없다면,
더 이상은 등산하지 않기로 동의하자꾸나.”

“네, 동의합니다.”
등산 준비는 단번에 착착 진행되었다.
예전에 알프스 남쪽을 오르기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어려운 암벽 등반을 하기 전에,
그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살아났다.

나는 뼛속까지 등산을 좋아하여,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언제나 도전을 향해 나아가게끔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예전에 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는 하지 말자고 타일렀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무모한 짓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분별이 없었는지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굳이 그런 옛 기억들까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등산을 할 일행은 스무 명의 노련한 짐꾼들, 내 친구 그리고 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산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나는 그 날 아침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다.
오늘 처음으로 여행해야 할 코스는 저 빙하의 바닥에 이르는 곳까지였는데
거리는 5 마일(8km) 정도로서, 태양이 뜨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그나마 거기에 도착하는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7시 경에 그 빙하의 바닥 부분에 도착했다.
그때 내 친구는 그 빙하의 오른쪽 부분에 돌출되어 있던 곳에다가
첫 캠프 기지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 빙하는,” 그는 설명해주었다.
“15 마일(24km)에 이른다네. 우리는 설선(snow-line)에 첫 캠프 기지를 설치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비축해 놓을 거란다.
그리고 저 곳에 이르게 되면 더 자세하게 계획을 짜보자꾸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경계선(wood-line)을 통과하여,
이제 우리는 탁 트인 곳(in the open)으로 나오게 되었다.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대며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하였다.
우리는 빙하 위로 걷지 않고 대신 빙하 주변을 따라 걸어갔는데,
빙하가 갈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험이 있었고,
또 빙하가 갈라져 있는 틈 위를 건널 수 있는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강물은
짙은 파란색과 흰빛을 내어 특히 아름다웠다.
갈라져 있는 틈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폭이 최소 20 피트(약 6m)도 넘었다.
그 사이로 떨어진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the high wind)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잘 가고 있었다.
암석 지대를 지나가는 것은 쉬웠으며,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바위 사이에 가려져 숨겨져 왔던 빙하 지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은 마치 유리와도 같아 너무 미끄러웠다.

우리에겐 특별한 빙하용 등산화가 있었다.
내 등산화는 내 발에 꼭 맞았으며 너무나도 편안했다. 내 친구와 나는 발 크기가 너무나도 비슷해,
나는 그가 전에 사용했던 등산화 중에서 한 켤레를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야크 버터로 등산화를 부드럽게 길들여, 발목 주변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등산화는 발에 잘 맞아 편안했으며, 손에 끼는 장갑처럼 발에 꼭 들어맞았다.
등산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발목 주변을 편하게 감싸주는 등산화가 있어야 하며,
이런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해야 얼음 부분을 헤치고 나갈 때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내 친구가 앞장서 갔는데,
그는 얼음을 파내며 걷는데(cutting step in the ice) 있어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도 수많은 등산가들과 함께 등산한 적이 있지만,
내 친구와 같은 전문가는 결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토록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등산가는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정상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채 우리는 올라가는 길 중
어느 한 지점에서 첫날밤을 보내며 쉬었다.

짐꾼들은 짐을 메고 우리를 따라 왔으며,
우리는 거대한 바위 사이에 있는 안식처에서 야영을 했다.
얼음벽 옆에 알코올램프를 밝혀 놓고는
커피와 고기와 보리빵과 버터와 치즈를 들었다.
우리는 맛있게 저녁을 먹었는데, 배고프기도 했거니와 공기도 서늘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친구가 선택한 그 장소는 눈사태가 나더라도 안전한 곳이었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기도에 대해 말해주기를 원했으나 그는 말했다:
“지금은 자는 것이 더 낫겠구나. 그게 지금으로서는 너에게 최선의 기도란다.
잠을 잘 자야 다음 날 아침에 기분이 상쾌할 테니 말이야.
날이 밝아와 지형을 식별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곧 출발하게 될 거란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지금 우리가 등산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일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니야.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단다.
보다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 우리의 일을 하도록 하자꾸나.”
우리는 침낭 안으로 들어가 장갑과 발라클라바 모자(balaklava headgear)를 쓰고는 이내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친구가 내 발라클라바 모자를 당겨 깨우기 전까지도 나는 잠들어 있었으며,
눈을 뜨자 햇살이 이제 막 뻗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지형을 식별하기에 충분할 만큼 날이 밝아올 거란다.”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등산화와 재킷을 입었다. 우리는 3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한 시간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다가 우리는 곧은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얼음과 바위가 엉겨 붙어 있으며 깎아지는 절벽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 어려움을 뚫고 나갈 방법이 나에게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는 말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

오늘 아침에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내려가
이 절벽의 반대편을 따라 가는 방법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꼬박 하루가 소요되지.
그렇다면 지금으로서 유일한 방법은 이 절벽을 오르는 것이야.
저기 튀어나온 부분이 우리를 지탱할 만큼 튼튼하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거란다.
저 부분 위로 밧줄을 걸 수 있다면 이곳을 오르는 일은 훨씬 쉬워질 거야.

내가 저기 올라가면 너를 끌어올릴 거란다. 
그리고 나머지 두 짐꾼도 그렇게 끌어올리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과 짐들은 저 둘이서 감당할 수 있을 거란다.”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바위가 튀어나온 그 부분은 튼튼했으며, 
그는 바위와 암석으로 엉겨 붙은 단단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 뒤에 내가 올라갔으며, 짐꾼들과 짐들도 모두 안전하게 끌어올렸다.

그 빙하의 정상에 도달하자
짐꾼의 우두머리는, 저기 튀어나온 곳 아래에 캠프를 친다면 어중간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보다 더 먼 곳에 또 다른 캠프를 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던 그 튀어나온 곳을 향해 건너갈 수 있었다.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바람과 눈으로 인해 단단해져 얼음처럼 되어버린 눈에 발을 디딜 곳을 찍어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던 그 튀어나온 곳에 올라서게 되었고, 거기서 야영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산 정상으로부터 6000 피트 (1800m) 내에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위험한 여행의 세 번째 날을 보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삼 일 이내로 정상에 도착해야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여기서는 바람이 허리케인처럼 엄청난 속도로 불어대는데,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거기를 지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사라져 버리지.”
그렇게 그날은 거기서 캠프를 설치한 후,
다음 날 우리가 정말로 하고자 했던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명의 짐꾼과 내 친구와 나,
이렇게 네 명은 언제나 로프(rope)를 사용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짐꾼들 여덟 명은 그 뒤에 따라왔다. 그들은 등산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으며,
난 그들의 로프를 다루는 솜씨가 꽤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다음 번 묵을 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운반하였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저 아래에 있는 캠프에 남아 있었다.
내 친구가 앞장서 갔으며, 그 뒤로 남자라는 이름의 짐꾼이, 그 뒤로는 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파호라는 이름의 짐꾼의 순서로 우리는 등산을 하였다.
시파호((Sipaho))는 “악이 비껴간다(evil averted)”는 뜻이고 남자는 “덮다(cover)”는 뜻이다.

내 친구의 피켈(ice-axe)을 다루는 솜씨는 훌륭했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그의 도끼로 두 번 내리쳤다.
우리는 꾸준히 나아갔고 마침내 버섯 모양의 정상에 이르렀다.
내 친구는 말했다: “저곳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보겠네.”

그러나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그는 대답했다. “혼자 가는 게 더 좋을 거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난밤에 말했던 네 믿음은 어디로 사라졌니? 이곳의 바람에 흩날려 가기라도 했니?”
나는 한 바퀴를 돌아서서 스스로를 추스렸다.
아직 나에게는 벗겨내야 할 자아의 껍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내 친구는 혼자서 갔다. 그가 떠난 지 30분 정도 지나자 우리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 눈사태가 한 번 크게 일어나 산 아래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는 얼음과 눈으로 뒤엉킨 그 길을 그토록 빨리 발을 디딜 홈을 척척 파내며 걸어갔고
몇 분이 지나자 시야에서 사라졌다.그가 돌아오자 나는 기뻤다.

나는 말했다: “아직 저에게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믿음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으나 바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 지나서 그는 말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곳을 지나갈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단다.
저 바위 면을 타고 올라간 후 눈으로 덮인 저 원뿔 모양의 윗부분을 건너,
정상으로 이어지는 돌출된 곳으로 가는 거란다.
길에 쌓인 눈이 충분하게 단단히 굳어 있다면 해낼 수 있을 테고, 행여나 그렇지 못하거나 실수를 한다면
우리는 미끄러져 100 피트(30m) 아래에 있는 저 암초 위로 떨어지게 될 거란다.

내 생각에 여기 쌓인 눈들은 부드러우면서도 깊게 쌓여 있단다.
이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이 원뿔 모양의 사면을 잘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단다.

상황은 이러한데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니? 너도 계속 갔으면 하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설마 이제 와서 제가 돌아가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단다.”

우리는 서로를 밧줄로 다시 연결시키고 위험한 얼음과 바위 면을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가까이 오는 것을 감히 허락하지 않던 그 원뿔 모양의 면에 우리는 도착했다.
눈은 단단히 굳어 있어 우리를 붙들어 주었으며 곧이어 그 돌출된 곳(the spur)에 도착했다.

내 친구는 돌아오는 길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다음번에는 여기에 캠프를 설치해야 할 거야.
장담하건데 이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어. 이제껏 그 누구도 여길 올라가는 길을 발견한 적이 없단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이 가파른 바위 면을 오를 수 없었던 것 같아.”

“스승님(you)께서는 어떻게 거길 오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 바위 면을 오르려는 사람은 스승님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가슴으로부터 웃었는데, 그 웃음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던 긴장이 풀리면서 나오는 안도의 웃음이었다.

우리는 그 돌출된 곳에 도착했고, 다른 사람들도 뒤이어 도착하자 우리는 밤을 보내고자 캠프를 설치했다.
이제 우리는 산의 정상으로부터 2000 피트(600m) 가량 떨어진 곳에 와 있었으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전날 푹 쉬었기 때문에 다음날 있을 마지막 강행군을 할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충만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해가 뜸과 동시에 출발했고 정오에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서자 녠첸탕글라(Nyenchentangla)의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들을 모두 볼 수 있었고,
반대편에 있는 계곡 아래쪽으로 거대한 호수가 보였는데,
길이는 50 마일(80km), 폭은 30마일(48km)에 달했다.
산줄기는 그 호수의 오른편으로 죽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호수만 하더라도 해발 15,000 피트(4572m)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호수는 남초(Namcho) 또는 텡리 노르(Tengri Nor)로 불렸다.
이 호수로 흘러드는 강줄기가 서른 개에 이른다는 것을 나는 일일이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
그 강줄기들 중 두 개는 현저하게 컸는데, 그 이름은 느강 추(Ngang Chu)와 트리 추(Tri Chu)였다.
왼편으로는 아직 탐사되지 않은 지역이 보였다.
거기에는 단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반면에 호수가 있는 편 아래쪽으로는 집이 몇 채 보였다.

우리는 산 속에 있는 그 집들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수천 피트 아래에 있어서 마치 바늘의 머리처럼 보였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티베트의 모습이었다
(This was Tibet in the raw). 내 친구가 말해주기를,

수 세기 동안 그곳 사람들은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아마 거기 사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마을 바깥을 나가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기를, 그들은 굳이 바깥에 나가고픈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기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다.
“저곳은 참으로 기묘하고 낯선 땅이지.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바깥세상이 더 낯선 곳일 거야.”

우리는 하고자 했던 것을 이뤄냈다.
이번 등산은 참으로 전율이 끼치는 경험으로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가 뉘블룽 리충(Nyiblung Richung) 산을 오른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고 가슴으로부터 만족감이 차올랐다. 우리는 하고자 했던 바를 이뤄냈다.
이건 매우 좋은 조짐이었고 나도 이를 알았으며, 내 친구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오후에 우리는 내려가기 시작하여 해가 질 때 즈음해서 캠프에 도착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도저히 말로는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내려가는 것은 예상한 것보다 쉽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잠사르를 떠난 지 십 일 만에 다시 잠사르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결코 그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경험은 말 그대로 내 수련의 일부였다.

우리가 산을 내려올 때 모든 어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죽 그러했다. 어려움들은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대가 신을 자기 자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하지 않을 때, 신께서는 직접 일을 하게 되신다.
또한 그대가 진리-신이 몸소 일하도록 허락할 때, 그분의 일은 광대하고 드넓으며 무한하며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신께서 몸소 일하신다(God does the work).
이것이 참된 믿음이며,
나는 뉘블룽 리충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이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돌아왔으며,
마을(town) 전체 (이곳을 마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바깥에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한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 친척 관계였다.
기쁨이 흘러 넘쳤으며,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잠사르의 끝에서 끝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회관(hall)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이들이 먹을 것을 들고 왔는데,
창(chang)이라는 이름의 전통 보리 맥주와 참파(tsampa)라는 이름의 티베트 빵이 엄청 많았다.
달걀도 서로 주고받았는데, 이는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념품으로서 주고 받는 것이었다.
이 달걀들 중 어떤 것들은 일 년이나 그 이상 된 것도 있었다! 

마을은 밤새 조화로운 행복 속에서 시끌벅적하였다.
내 친구와 나는 그의 안식처로 갔다. 우리는 십 일 동안 씻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에 이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씻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물이 흘러들어 오고 있는 수영 연못(swimming pool)으로 들어갔다.
물은 상쾌하고 따뜻했으며, 우리는 물이 들어오는 곳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다.

내 친구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at hall) 우리에게 준 음식부터 좀 들어야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놀랍게도 음식 중에는 구운 닭고기와 구운 감자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참으로 맛있었다.
내 친구는 티베트말로,  전에는 결코 정복된 바 없는 그 산의 정상에 
우리가 어떻게 도착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설명할 때 주위는 지극히 고요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가장 어린 아이도 뉘블룽 리충을 오르내리는 그 이야기에 깊이 몰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 친구의 목소리는 참으로 근사했으며, 그대도 거기에 있었다면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내 친구가 말할 때, 그 목소리는 그대를 매혹시킬 것이다.

티베트 여자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남자들과 동등하며,
여자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산악인이기도 하다.
여자들 역시 쟁기질을 하고 땅을 파고 물을 나르고 나무를 한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모든 면에서 능숙하며,
오히려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관해서는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
어린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은 보리 맥주(chang)를 한껏 마셨다. 

티베트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싸우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고, 술을 마실수록 그들은 더욱 즐거워진다.
티베트 농부들 사이에서 도덕에 대한 관념(morals)은 상당히 느슨한 편이다.
그들은 도덕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으며, 그날 밤 거기서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티베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소녀가 임신을 하더라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연령에 이른 여자에게 아이가 없는 모습을 그대는 좀처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행복한 민족은 세계 다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겨울에는 특히 가혹할 정도인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기온은 영하 상태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이 기후 조건에 적응하였다.
이들은 다른 곳의 날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그래서 이곳 날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 친구는 잠사르의 왕이라 할 정도였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가 지닌 지혜와 사랑과 이해가 그 비결이었다.
나는 그가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참으로 진리의 화신이었다.
모든 조건에서 자유로운 그의 마음을 통해서
진리는 어떤 방해나 제한도 받지 않고 몸소 일을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피곤한 줄 몰랐는데
일단 잠이 들자 만족감에 젖어들어 통나무처럼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이미 해는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나는 뉘블룽 리충 산을, 이제는 거기를 오르려는 열망이 아니라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올려다보며,

내 친구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저 산을 보고 있자니 뭔가를 해냈다는 만족감이 차오릅니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일을 시작할 거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난 번 산에서 저는 기도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를 위해 기도라는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너에게 있어 기도란 무엇을 뜻하니?”
“음, 보통 저는, 뭔가가 필요하거나
고통 중에 있거나 아플 때에 기도를 하곤 합니다.
때로는 감사를 드릴 때도 하구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너는 기도하고 있을 때, 너는 대체로 뭔가가 불확실한 상태에 있지는 않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불행하거나, 혼란스럽던가 말이야.”
“예, 행복하거나 만족을 느낄 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말이야.” 그는 말했다.
“기도가 어떤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에 틀림없다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도를 그만두었을 테니까 말이야.
구하면 받는단다. 자신의 믿음에 정도에 따라서 구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기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예수께서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받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이는 진리란다.”

“그러나 자신이 기도할 때를 살펴보면,
너는 어떤 형태로든지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단다.
높은 수준이건 낮은 수준이건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는 마음은,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얻게 되지.
그리고 그런 믿음이란 거의 맹목적인 믿음이지.
그러나 기도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밝혀낼 수 있을 거란다.”

“자, 너는 기도할 때 무엇을 하게 되니?
응답을 구한다 하면서, 어떤 단어들을 반복해서 말하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거나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더냐?
이런 식으로 응답을 구하다보면
마음이 다소 고요해지기는 하겠지.

그리고 그런 고요한 상태 속에서
너는 만족감도 느끼게 될 것이고 말이야.
그리고 고요한 상태에서라야 마음은 응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는 기도는
뭔가를 끊임없이 청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지는 못한단다.
뭔가를 바라고 구하며 결과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등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란다.”

“기도할 때” 그는 또 말했다.
“너는 언제나 도와달라며 손을 바깥으로 뻗치면서
뭔가를 기다리거나 바라고 있단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라는 상태도 같이 존재하게 된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해달라고 분투하고 있단다

(You are striving to lose one and gain the other).

그러나 네가 보고 있듯이,

기도란 결코,
자신을 기도하게 만드는 그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단다.
그러므로 언제나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고,
이 불안한 상태가 마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방법이란,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겠니?”

“기도란 기도하는 자에게 달려 있단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청할 때 그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단다.
그리고 그 반응이란 여러 세기에 걸쳐 쌓여 있는 무의식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말이야.
그리고 기도하는 이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는 청하는 것을 받게 되어 있다네.
예수께서 ‘받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말이야.”

“그러나 마음이란 언제나 대립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지 않더냐?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선와 악 등과 같이 말이야.

마음의 모든 과정을 다 이해하고 나서야 너는 이 대립의 상태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기도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란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도 자체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단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기도는 네가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그 상태를 마음이 다시 만들어내는 것을 막지 못한단다.”

“세상은 오랫동안 평화를 위해 기도해왔지만,
평화는 언제나 저 먼 곳에 있어왔지.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거지?

실패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기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기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기도하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갈등에 빠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만 기도한단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란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마음, 자아가 바로 문제의 원인이거든.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떠들지 않게 되고,
마음을 강제로 고요하게 만들 필요도 없게 되며,
전에 내가 설명했듯이, 다만 바른 명상을 통해서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는 것이야.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있단다.
그리고 실재는 그 어떤 문제도 갖고 있지 않지.

자아만 스스로가 기도하고 있는 문제를 만들고 있을 따름이지.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인데,
문제의 원인이란 바로 나(the you), 자아(the self)란다.
실재 안에서는 존재를 갖고 있지 못한 ..자아의 본래 상태를 이해하고 나면
자아는 사라져 버리고 따라서 문제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

그러면 네가 창조하지 않은, 그러나 창조성 자체인 실재가 그 즉시 들어서게 된단다.
이것이 참된 기도야. 이것이 존재자(Being)이고.
이‘존재자'를 깨닫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뤄내고, 모든 곳에 두루 일하며, 그 어떤 한계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자’의 상태를 먼저 경험해야만 한단다.

나는 자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침묵(silence)의 상태에 있었다.
이 침묵은 자아가 움직이는 방식과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함으로써 오는 것이었다.
이 깊은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그가 말하듯이, ‘재잘대는(chatter) 것’을 멈추었고,
실재는 거기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문제는 자신이 본래 속해 있던 무(無) 속으로 돌아갔다.

실재만이 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창조될 수 없는 창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였으며,
마음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마음이, 곧 내가 이 사실을 이해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재잘대지 않았고, 따라서 문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며,
자기-이해가 없다면 그 어떤 해결책도 없다.

이것이 참된 기도이다.

이것이 참된 명상으로서,
실재는 그 명상의 상태 안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실재는 드넓게, 아무런 제한 없이 일을 한다.
신 홀로 그분의 집을 완전하게 차지하시게 된 것이다

(God occupied His own House completely).


-7장-

나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가란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야 나는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쓰고자 했던 이 책에 붙일 이름을 항상 원했었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나 제목, 지위, 서열, 관념 등
어리석은 마음이 먹고 사는 모든 것들(all that the stupid mind feeds on)에 쉽게 현혹된다.


마음은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먹고 살 수 있을 따름인데,
그저 생각, 단어, 믿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들이 마음이 먹고 사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은 자신을 휘저어대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렇게 마음은 계속해서 지껄여 대기만 하는데,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멈추게 된다.


미숙한 마음은 언제나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신의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창조해낼 뿐이며,
이렇게 해서 원인과 결과라는 끝없는 사슬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 자신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인과의 사슬은 끝나게 된다.
정치가들, 경제 전문가들, 교조주의자들(dogmatists)
그리고 다른 모든, 무슨 무슨 주의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고 있는 지도자들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로 마음이 꽉 차 있다.
이를 스스로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자기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단어들을,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모아 놓는다 할지라도
이 최면 상태를 빠져나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조건을 강화시키고자
여기 저기 떠돌며 관념들을 추구하는 조건화된 마음에 양분을 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은 결코 창조적(Creative)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창조성(Creativeness)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그대는,
어떻게 해야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련다.
그대는 어떤 기술(technique)을 연습함으로써
자신이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잠시 내 말을 들어보겠는가.

하루에 여덟 시간씩 악기를 연습하면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책을 쓴다 해도, 작곡을 한다 해도, 시를 쓴다 해도, 발언을 한다 해도,
연설을 한다 해도, 그 행위 자체가 창조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대는 완벽한 연설가이며, 유능한 작가이며, 좋은 화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여전히 ‘나’(the me)가 존재하고 있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
홀로 창조적인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나-자아가 아니던가?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다 :
이를 위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란
다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갈등이 지속되는 한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갈등이 창조적 행동을 방해하고 있지 않던가?
마음이 대립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은 창조성을 몰아낸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창조적 상태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창조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은 그저 있을 따름이다

(Creativeness is not created. Creativeness is).

마음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갈등을 일으키는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때,
비로소 창조성이 그 마음 안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그리스도-영
홀로 창조적이며,
그대는 이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마음이 전적으로 고요해질 때라야,
마음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창조성이 들어설 가능성이 열린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조성이란 그저 자기-표현(self-expression!)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중요한 듯 여겨지고, 다른 누군가가 된 듯한 느낌만 주는 자기-표현 말이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공허함과 무지 자체이며,
자아를 계속 키울 뿐이며,
자아는 창조성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창조성은, 자아가 부재할 때,
모든 대립이 사라져 고요해질 때,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이다.
자아가 스스로 창조적으로(creative) 되려고 추구하는 한,
창조성(Creativeness)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아가 끝장이 나야만 창조성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홀로 창조적이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몸소 홀로 일하실 때,
거기에 참된 창조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쓴 이 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바를 사람의 손으로 기록하여 성서에 실려 인쇄되어 있는 말들처럼
정확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그대에게 전해주고 있다.
말이나 말의 의미 자체로는 결코 창조성을 전할 수 없다는 것과,
자아가 부재할 때라야 창조성이 스스로 일하게 되며,
그때 창조성은 어떤 대립이나 갈등도 없이 광대하고 무한하게 일하게 된다.

* * * * *

만약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이것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지 그렇지 못할지에 대해 마음을 졸였다면(concerned),
이 책은 결코 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아가 이를 가로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가 스스로를 알고 있을 때,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보이며,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도 없게 된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자신이 선호하는(pet) 생각이나 믿음 때문에 이 글에 반응하고(reacts) 있을 뿐이라면,
또 이 내용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있다면,
그대는 아직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따라 반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아를 이해하고, 어떻게 마음이 묶여있는지를 이해하려는 수단으로써
이 글의 보다 깊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때 변혁(transformation)이 찾아온다.

변혁은 마음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변혁은,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던 자아가 소멸되는 결과로써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것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비로소 마음은 재잘대는 것을 그치게 된다.
그리고 그 고요함 뒤를 따라서 실재가 있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꾸준히 공부했다.
우리는 토론을 하면서, 단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밝혀냈고,
이는 나에게 꼭 필요했던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신적 개념에 불과한 다양한 요가 체계들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나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이제야 왜 그것들이, 신의 사랑과 지혜 자체인, 그리스도의 자유에 이르는데 방해가 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진리에 대해서 씌어졌다.
그대가 살펴보기만 한다면, 새로운 사상(thought)이란 사람들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적(mental)”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들은 모두 마음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관념일 따름이다.
마음은 집중과 요가 수행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자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가는 자아, 즉 마음이 고요해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내 친구는 이런 말들로 우리의 공부를 시작하곤 했다:
“마음의 내용물들(What the mind is made up of)을 이해함으로써만이
마음을 넘어서 있는 실재는 드러날 수 있는 것이야.
그러나 자아가 있고 자아와 대립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진리란 결코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은 자아가 언제나 앞에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지.
그럴 때 진리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단다.
그러나 진리란 수단이 아니며 시작도 끝도 갖고 있지 않단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마음에 갖고 있는 것들은 자아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이 말이 끝나면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토론을 시작하곤 했다.
한 때 나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이 그친다면,
그때 우리는 생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 뭔가를 알 수 있을까요?
(How can we know anything if thought ceases?)”

이 질문은 그대 역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와 똑같은 질문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만약 지금 내가 너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면,
너는 이 도전(challenge)에 즉각적으로 응답(respond)하게 되고,
그러면 너는 생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 내 친구는 말했다:
“그러므로 네 생각이란 도전에 대한 반응이야.
그런데 반응(response)이란 언제나 과거의 결과일 따름이지.
왜냐하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전부 과거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마음은 새로운 그 무엇을(the New) 알지 못한다네.”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몇 분 후에 또 다른 질문을 너에게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너에게 또 다른 도전으로 다가오겠지. 그리고 너는 다시 생각하기를 시작할 테고.”
“예, 맞는 말씀입니다.”
“자,” 그는 말했다.
“그런데 반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반응, 너의 대답은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나오고 있지.
그러면 그런 반응이란 언제나 오래된 것일 테고 말이야. 그렇지 않겠니?”

“자 이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에게 묻겠다:

너는 신을 믿고 있니?
그러면 너는 이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테지만,
그것은 너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을 통해 나온 반응일 뿐이야.
네가 신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는 네 마음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에 의해
묶여(conditioned) 있기 때문이지.


또 반대로 너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
신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네가 그렇게 무엇인가를 믿고 믿지 않고 하는 것은,
네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신의 기억이란 경험의 결과이며,
경험이란 곧 지식이고, 지식은 과거에 속한 것이지.
그러나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신을 알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thinking)이란 과거를 바탕으로 나오는 반응인 것이지.
생각이란, 사람의 배경, 인종, 종교적 신념(creed), 믿음, 지식, 관습, 의식과 무의식 등과 같은 것들에 따라서
개인적, 집단적으로 각기 다른 차원에서 반응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결코
새로울 수 없는 것이지.
네 마음이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잠깐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다네.

너는 지나가버린 순간, 즉 기억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단다.
마음이 고요할 때에만 비로소 너는 지금 이 순간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지금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단다.
만약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과거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the living moment) 동안
너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aware)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단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자아가 사라져,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지.
지나가버린 순간은 기억일 뿐이야.

그러나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은, 여전히,
현재 속에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일 따름이란다

(but the living moment is still the living moment in the present).


너는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할 텐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자신이 있고, 경험이 있게 되어 버리지.
그러나 그런 경험이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야.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자아가 부재할 때 다만 살아있는 현존, 실재, 영원이 그저 존재하고 있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언제나 있을 따름이야.

그러나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단다.
그것이 지나가버리고 나면 다시 붙잡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것은 기억일 따름이고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너는 과거, 알려진 것(the known)을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알려진 것은 언제나 과거이지.

그러나 항상 현존하는 순간(ever-present moment)은
언제나 새로운데(New),
이것이 바로 네가 그것(It)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며,
그것은 언제나 마음을 넘어서 있단다.

마음이 고요할 때라야 그것이 있게 되는 것이며,

그때에는 경험자는 사라지고 다만 경험만이 있을 뿐이지.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있고, 경험이 있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지.

그러나 그것은 과거일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네가 이해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란다.”

“이제 너는,
생각하는 행위(thinking)는... 결코 스스로를 새롭게(renew)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생각이란 언제나 오래된 것이지.
그리고 생각이 새롭게 만든 것들도
모두 오래된 것들이고.
그 오래된 것들이 자신의 조건이 되고,
자신의 전통, 자신의 인종, 자신의 경험, 자신의 믿음이 되는 것이야.

그러므로 생각(thought)이란
오로지 스스로를 투사시킨 것만 알 수 있단다.
생각은 자신이 전에 이미 경험해본 것들만 인식할(recognize)할 수 있을 뿐이야.”
“그렇다면 생각이란
그저 전에 알았던 것을 다시 인식하는 것뿐이야.
생각은, 그 자신 너머에 있는 것은 결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지.

생각이란
그저 상징, 말들, 단어들, 이미지들, 경험들일 뿐인 것이고, 
/이런 것들이 없다면 생각이란 존재할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이라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생각은 지나가버린 것들만 알고 있을 따름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할(think on) 수 없기 때문이란다. 
또 생각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생각은 오로지 오래된 것만 알아보고(recognize) 
새로운 것을 결코 알아보지 못하거든. 
네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기억이 되어가고 
 너의 생각이란 기억의 산물일 따름이지.”


“네,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스승님(you)께서 이토록 쉽고 분명하게 제 앞에서 말씀해주시니,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것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각은 새로운 것들은 결코 알지 못하고 다만 오래된 것들만 알 뿐입니다.
생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투사할 따름인데, 그것들은 바로 기억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모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그는 말을 이었다.
“네가 자기 자신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스스로를 정신적 개념으로 인식하는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야.
‘나’는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기억들을 말(words)과 이미지와 상징의 형태로 경험하고 있지.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은 지나가버린 것만(the past) 경험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결코 새로운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은, 신 또는 실재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인데,
신 또는 실재는 앎을 넘어선 것이며,
창조될 수 없는 것이자
형태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서
어떤 상징이나 말도 갖고 있지 않단다.” 

“‘신'이라는 말 자체는 신이 아니야.
또한 신은 이미지도 아니지:
신은 생각(a thought)이 아니야,
만약에 신이 생각이었다면, 
너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what he was) 알았을 것이야.

그러나 이제 너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왜냐하면 신은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오직 자신에게 알려진 영역 안에서만 기능(function)할 뿐이야.
자신을 넘어서 있는 곳에서는 활동할(function) 수 없지.”


“이제 저도 분명히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에 대해 생각하려 하는 그 즉시
마음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자신에게 알려진 영역으로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불가능합니다.
알려지지 않는 그것은 결코 마음에게 알려진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링-쉬-라 은수자께서도 저에게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앎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Unknown)이 들어서게 되는 것은,
생각이 그칠 때라야 가능하단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해야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질문은,
아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란다.
‘나’, 마음, 자아, 이것들은 모두 하나이며 같은 것이야.
자아란 그저, 관념과 이미지와 말(words)과 상징의 다발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들은 그저 기억일 뿐인 것이며,
그것은 스스로를 투사한 것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단다.”

“자신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마음이 말하고 있다면,
마음이 경험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투사된 것을 경험한 것뿐이야.

그런데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이라 믿고 있는 것뿐이지.

그러나 마음이 스스로, 자신이 투사된 것일 뿐인 그것을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그것으로 착각해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게 된단다.

실재를 찾느라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고요함 뒤에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들어서게 된단다.
그러면 그때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며
그 일은 무한하게 뻗어나가지. ...생각은 과거, 기억에 제한되어 있지만,

알려지지 않는 그것은
언제나 지금 있을 따름이란다. 그것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새로울 따름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그저 마음의 새로운 감각 상태(new sensation)를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나 감각(sensation)이나 관념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아니란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결코 인식될(recognize) 수 없단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그저 있을 따름이지.

그것은 마음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야.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그저 알려지지 않은 그것에 대한 관념이며,
마음 즉 자아가 투사된 것일 뿐이야.
너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창조해낼 수 없단다.
이제 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렇지 않니?”

“네.” 나는 말했다. “모든 것이 훨씬 명확해졌습니다.”
“실재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는 설명해주었다.
“너는 반드시 생각의 모든 과정(the whole process of thinking)을 이해해야 한단다.
그리고 생각의 모든 과정이란, 자아 즉 마음이 활동하는(working) 것이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저
기억, 경험, 관념, 이미지, 상징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이 스스로 분명히 보고 나면, 마음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을 경험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고요해지게 되지. 마음이 고요할 때라야, 강제로 고요해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히 고요해질 때라야, 그 고요함, 그 평온함 속에서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란다. 
 ”자아와 실재를 낱낱이 밝혀 드러내는 이 토론(discussion)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즐거웠다.

토론 과정에서 내 친구가 말하곤 했던 내용들을 나는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대화의 기록이 그대에게, 마음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결코 미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대 역시 생각(thinking)이란 오직 지나가버린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NOW), 언제나 현존하는 지금 이 순간(the ever-present NOW) 실재는 존재한다.
생각이 멈춰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이며 그때 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대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라야, 마음이 창조해낸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울 때라야,
그대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과거란 기억이며 미래란 과거가 투사된 희망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만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생각은 
영감을 통해서 오는 것이며,
영감이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존재하는 
지금(the now)이 
스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Pure thinking comes through Inspiration which is the expression! of the now, moment to moment).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순간의 괴로움은 그 순간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Take no heed for the future, sufficient unto the moment is the evil thereof).”


다른 기회에 나는 이런 질문을 했었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바의 눈으로 볼 때,
예수의 말들을 포함해서 예언자들의 말들이 어떻게 해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말(words)이 결코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을 죽이는 것은 바로 말이다
(It is the word that killeth).’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이 진리를 가리고 있음을 뜻하고 있단다.

물론 우리는 진리를 향해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단다.
그러나 이성(reason)은, 우리가 침묵의 문(the door of Silence)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멈춰야만 하지.

그리고 침묵의 문이
바로 진리로 들어서는 입구인 것이고.”

“아들아, 네가 알고 있듯이,
소위 성서라 부르는 거룩한 말씀은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진 것이란다.
이것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지.

신약성서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고 나서 150년 뒤에 씌어졌지.
십자가형은 그 당시에 사람을 죽이는 수단이었고 말이야.
오늘날 서구 세계에는 사람들을 죽이는 여러 방법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지.
교수형 밧줄, 단두대, 전기의자, 총, 폭탄, 그밖에 다른 도구 같은 것들 말이야.”


티벳트 성자를 찾아서의 후속편
그리스도의 요가 中에서...
64쪽까지 올려놓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