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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구름바람산
명상 & 의식

제법개공(諸法皆空), 일체개공(一切皆空)

by 고요한 강 2019. 4. 2.

제법개공(諸法皆空) 일체개공(一切皆空)

이란 범어로 수냐(Sunya)라고 하는데,
그 뜻은 '텅 비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의 본래 의미는 일체법(一切法)은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거기에 아체(我體), 본체(本體), 실체(實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空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것을 다른 말로 제법개공(諸法皆空),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 현상계를 공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공관이라고 하여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공은 허무가 아닙니다.

 공을 관찰하는 것은 그대로 진리에 대한 발견입니다.

 

그래서 진공(眞空)은 그대로가 묘유(妙有)라고 해서 진공묘유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즉, 진정한 공은 묘하게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경전 전반에 거쳐 설해진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반야부 경전에서 그 이론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공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크게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 있으며, 많게는 이십공(二十空)까지 있습니다.
여기서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한 마디로 공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규명짓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사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실상이 텅 빈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실상대로 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끝없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괴로움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서는 공관으로 현상계를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분명히 있는 것인데 왜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모든 것을 공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실체이든 하나로 고정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현상계의 모든 것은 공한것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고정불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 입장은 무엇이든지 되고자 한다면 그 의지대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컵이 있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 그것은 물을 마시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컵이 그 하나의 기능으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컵으로 상대방을 향해 던져서 상처를 냈을 때는
흉기로도 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컵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실체가 공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것입니다.
공이라고 해서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진정하게 공한 것은 묘하게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허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공의 차원은 본래 공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한 가지 고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 중국 변방에 어느 노인이 외동 아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말타기를 좋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말타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은 그만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위로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을 나갔던 말이
다른 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좋아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이 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외아들은 말이 두 필이나 되어 더욱 신이 나서 말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이 말에서 저 말로 뛰어오르며 말타기를 게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외아들은 그만 잘못하여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또다시 동네 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하며 다리 병신이 된 아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을의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다리 병신이 된 그 아들은 전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마을의 청년들은
모두 죽었지만 다리 병신이 된 그 아들은 살아남아 아버지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말합니다.
흔히 무슨 일의 결과에 따라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
이것은 곧 좋은 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나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근본이 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현상계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옹지마의 고사에서 살펴보면 말을 살 수도 있고, 그 말이 도망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올 수도 있고, 말을 타다가 다리 병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근본이 공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집과 집착은 세상은 늘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의 차원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있는 것으로 깊이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거짓 껍데기에 집착하여 생기는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감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우리에게 큰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반야심경>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임을 거듭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라고 하는 실체는 텅 빈 것이므로
그 텅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자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말입니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자기 자신의 실체는 본래 백지와 같습니다.
그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령 백지 위에 성자의 모습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그림을 한 순간에 먹칠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한 사람도 무식해질 수 있고,
무식한 사람도 유식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텅 비어서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고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으로 생각하면 괴로울 게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좋은 방향으로 전화위복이 되어
또 다른 삶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 한순간 가능성은 무한한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좁은 안목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물질에 대해 텅 빈 것으로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신작용에 대해 공의 입장으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감정들을 텅 빈 것으로 볼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예을 들어 부모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누구나 슬퍼할 것입니다.
온우주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슬픈 감정 속에는 얼마든지 다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슬픔의 감정에 휩싸여 있어도 주위의 돌아가는 온갖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 속에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남을 미워하는 온갖 감정들이 끊임없이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질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넓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미움이나 슬픔 등의 감정 속에도 그 안은 텅 비어서
얼마든지 다른 감정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실체가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의 감정, 슬픔의 감정이 일어나면 온통 그런 감정 뿐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이며 환영입니다. 환영이나 착각과 같은 그릇돤 인식작용에 끄달려서 온갖 문제에 휩사이게 되는 것입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물체가 발부리에 걸렸습니다.
그는 그것이 뱀인 줄 알고 정신없이 도망셵습니다.
다음 날 다시 그 자리에 가 보니 그것은 한낱 새끼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온통 상처로 얼룩지는 것입니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모든 것의 분별이 가능합니다.
영원할 것 같은 감정들도 알고 보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숱한 감정들은 뿌연 안개처럼
잠시 우리 앞을 가로 막아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실상은 텅 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볼 것인지,
아니면 밝은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환히 분별할 것인지는
바로 공의 지혜를 터득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개되는 온갖 문제들, 또는 온갖 좋지 못한 감정들은
우리를 괴로움의 덫으로 옭아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문제를 낳아 눈덩이처럼 자꾸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방법은 근본이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보다 낳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에 대한 지혜의 안목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공이기 때문에 인연에 의해서 무엇이든 가능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이 되는 공사상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아무 걸림없이
꿈과 희망과 포부와 기대를 갖고 살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空과 般若
앞에서 공이란 일체의 현상계가 존재하는 영원 불변한 법칙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 법칙으로서의 공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 그 자체가 곧 반야입니다.
반야는 범어로 프라야나(Prajna)라고 하는데 '혜(慧).지혜(智慧).명(明)' 등의 뜻이 있습니다.
즉, 반야는 모든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반야의 지혜를 통해야만 성불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며, 어머니인 것입니다.
또한 반야는 제법(諸法)의 여실한 이치를 밝힐 뿐만 아니라 중생을 교화하는 실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반야의 지혜는 단순한 세속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인생과 우주의 참 모습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일, 그 자체가 바로 반야의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성(空性)의 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최상의 완전한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그래서 공과 반야는 하나로 연결되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 이해가 곧 반야이며,
반야는 곧 공의 실상을 깨닫는 일인 것입니다.
반야는 일체의 사물이나 도리를 궁극점까지 추적해서
그것의 영원한 진실을 파악하는 일 자체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반야의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탐.진.치 삼독과 번뇌로 뒤덮여 반야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번뇌를 제거하는 일이 곧 반야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결국 번뇌와 반야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와 반야의 실상은 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중심 사상은 공이며, 반야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궁극 목표이기도 합니다.
반야의 완성, 곧 지혜의 완성을 향한 부단한 노력없이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은 이 현상계에 너무도 매혹되어 진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을 깨우기 위한 반야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되 현실에 푹 빠져서 캄캄하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지혜의 밝은 눈으로 인생을 관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반야심경>의 교훈입니다.
지헤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관조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지혜에서 온다는 것을<반야심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흔히 인간 행위의 진정한 귀결점은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다고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 당면한 어떤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낙(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 그 자체는 고에 해당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에 대한 것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현대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문제로 대처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한 낙의 상태가 되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안함은 완전 무결한 상태의 평화를 말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지극히 편안한 극락(極樂)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곧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실천,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는 밝아 태양과 같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길을 가다가 무엇에 부딪히면 그저 막연하게 돌이거나 나무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한낱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런 막연하게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반야의 지혜는 밝은 태양과 같은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돌인지, 나무인지, 짐승인지, 사람인지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용담 스님과 덕산 스님이 있었습니다. 용담 스님은 남방의선 수행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반면에 덕산 스님은 <금강경>을 평생 연구하는 학자로서 그 분야에서는 일인자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의 명성을 꺾으려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이 평생 연구한 업적이 담긴 서적을 짊어지고 가서 용담 스님을 만났습니다.  

덕산 스님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덕산 스님은 그만 잠자리에 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칠흙같이 어두워 신발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덕산 스님은 신발을 찾기 위해 용담 스님께 촛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

 

그런데 용담 스님은 촛불을 건네 주고는
덕산 스님이 신발을 찾으려 할 때 그만 촛불을 확 꺼 버렸습니다.
갑자기 천지가 암흑처럼 어두워졌습니다.
그 순간 덕산 스님은 깨달음의 밝은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덕산 스님은 자신이 평생을 연구한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지식의 안목은 한낱 허공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알음알이로서의 지식과 반야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과 지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막연하게 돌이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밝은 태양 아래서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결국 <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은 공의 이치를 관조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써 문제를 해결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를 공의 원리에 입각해서 관찰할 때 반야의 지혜는 저절로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과 연기(緣起)
공사상과 관련지워 연기설은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연기법에 의해 모든 현상들은 생성, 변화, 발전, 소멸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빼고는 불교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연기설은 중요한 교리입니다.
연기는 범어로 프라티탸샤무파다(Pratitya - Samutpada)라고 합니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여서 말한 것으로,
무수한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 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여러 자기 조건, 곧 인연에 위해서 잠정적으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일체법은 조건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空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이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이 가능합니다. 결국 공사상과 연기의 법칙은 불가분의 관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연기의 공식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因此有彼 無此無彼 此生彼生 此滅彼滅-중아함 권47)'입니다.
이 말씀은 연기의 법칙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상호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며 자존적인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조건이나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체개공(一切皆空)도 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상호의존 관계에 의해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현상은 개별적으로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空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체는 연기에 의해 존재하며 자성이 없는데, 그것은 곧 空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현상게는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연기의 법칙 때문입니다. 연기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연은 자꾸 변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법칙은 인연에 의해 잠깐 있는 것이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공사상도 텅 비어서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질은 텅 빈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보면 공인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비추어 볼 때, 살아 있으나 확실히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인연이 다했을 때는 사라져 없어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생성, 변화, 발전, 소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離滅)'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성주괴공이란 물질이 구성되어 없어지는 기간을 사기(四期)로 나눈 것입니다.
물질이 처음에 생겨서 얼마 동안 존재하다가 점차 파괴되어 끝내 없어져
공무(空無)한 것을 성주괴공이라고 말합니다.
 
 
또 생주이멸은
주로 정신적인 측면의 변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 머물렀다가 변화하여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존재이든 모든 것은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칩니다. 고정불변한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현상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온갖 복잡한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옷깃을 한 번 스쳐도 오백년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의 물질이나 현상이 생기기까지는 엄청난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가 생기는 것도 많고 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믿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런 생각은 거의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인 것으로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이든 인연에 의해 생기면 반드시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로서 존재한다는 법칙을 원리대로, 또 사실대로 이해한다면
설사 문제가 일어나도 그것은 괴로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어른이 늙어가는 것은 슬퍼하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것은 대견해 합니다.
이치적으로 따진다면 어린 아이가 자라는 것도 슬퍼해야 합니다.
존재의 법칙에 입각하면 이 두 가지는같은 맥락에서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에 맞는 일만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 하거나 부정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은 결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현상계의 모습은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연기의 관계 또한 두 가지 원리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공이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면 생기게 되고 인연이 사라지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근간에는 공사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으로 공사상, 공과 반야, 공과 연기의 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경문의 해설을 통해 그 내용을 보다 명확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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