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햇살구름바람 산
명상 & 의식

비 동일화 (Dis Identifikation)/ 에픽테토스

by 고요한 강 2011. 4. 3.

비동일화 / 에픽테토스

제1장 자기 자신 외에 상처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1.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 - ②

(3) 하느님의 증인인 인간

이와 같은 경건한 말을 보면, 교부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왜 에픽테토스의 생각을 반복해서 엮어 넣었는지 이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부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헌신하는 인간을 다룬
에픽테토스의 생각에 뒤지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와 자비를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증언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다 (614).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이의
기본 정서는 感謝이다.

에픽테토스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땅을 파고 호미질을 하고
먹을 때에만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가를, 노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우리가 땅을 경작하기 위해
이 도구들을 쓰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훌륭하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손, 목구멍,
배를 주셨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노래해야 한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선사하신 사물을 이해하고
질서 있게 사용하는 능력을 찬미하는 가장 장엄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야 한다"(614)

특히 죽음에 이르는 자세에 관하여 에픽테토스는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旅行이다.

죽는 순간, 에픽테토스는
하느님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당신께서 저를 지으셨기에 당신과
당신의 모든 하사품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호의를 즐겼던 시간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615)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신께서는 제가 참여했던
큰 잔치에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떠나갑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가장 큰 잔치에 참여하게 한 것에,
제가 당신 업적을 보게 한 것에, 그리고
저를 당신의 질서에 넣어 주신 것에,
무조건 감사드립니다."(614)

이 말에서 하느님께 대한 그의
큰 사랑이 드러난다.
 
여기서 하느님은
스토아학파의 비인격적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에픽테토스가 기도를 드리는 그가 갈망하는,
그 자신이 체험하도록 허락받은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인격적인 하느님을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125년에서 130년 사이에 죽었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인 아리아노스 Arrianos가 에픽테토스의
<어록 Discourses>을 네 권의 책으로 엮었다.

에픽테토스는 초기 교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유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바실리우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에픽테토스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생각을
복음과 일치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성경에서도
사람들과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비슷한 가르침을 발견했다.

교부들에게 그리스도는 참된 해방자이시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사한
자유의 주변을 맴돌았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자주 거부당하고 계속 박해를 받았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들이라는 생각과,
이 세상의 권력자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얻었다
.
 
이는 외부에서 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적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존엄성을 체험한
하느님의 세계로 옮겨 갔음을 알게 되었다.
 
(4) 에픽테토스와 초인격 심리학

어떻게 에픽테토스가 오늘날 초인격 심리학의
많은 생각들을 앞서 갔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에픽테토스는 사물이 건드릴 수 없는
원래의 나(자아 Ich)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초인격 심리학은
이를 영적인 참자아( Selbst), 즉
내적 근원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세상 문제에는
내적 근원으로 가는 통로가 없다.

초인격 심리학에서
내적 참 자아로 가는 길은
비菲동일화(Dis Identifikation)의 길이다.

나는 내 기분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고조되는지를 관찰하고 알아차린다.
그런 다음 깊은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짜증 그 자체를 알아차린다.
그러나 내가 곧 나의 짜증은 아니다.'

내 안에는 짜증이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이 내면의 영역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
즉 내면의 증인이다.
 
이 내면의 증인은,
느낌 그 자체를 알아차리지만

그 느낌과 동일화하지 않고,
느낌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에픽테토스는
이 내적 참자아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고 묻는다.

내 권한 안에 있는 사물과
그 권한 밖에 있는 사물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참자아의 내면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내면의 영역에서, 사물은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재산, 건강, 인정과 같이 ,
내 권한 밖에 있는 것은,
그것들에게
권한을 내가 부여하지 않는 한,
내게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어떤 사물에 권한을 부여하는지 여부는,
사물에 대해 내가 만들어 놓은
내 表像에 달려 있다.


(5) 에픽테토스와 의사소통론

이렇게 에픽테토스는
사물에 관한 표상들이
우리의 체험을 결정한다는
현대 심리학의 견해를 앞서 갔다.

'우리는 실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특수한 안경'을 쓰고 실재를 본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대나 염려를,
사물 속으로 투사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투사 안경을 통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그들 안에 투사하고
그들의 행동을 잘못 해석한다.

바크라비크 P.Watzlawick는
도끼의 예를 들어
아주 해학적으로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도끼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이웃사람이 훔쳐갔다고 의심한다.

그다음에 의심의 안경을 끼고
하루종일 이웃사람을 바라본다.

그는 도끼 도둑과
이웃하고 있다는 기분에 편승한다.

그는 이웃사람의 태도에서,
자신의 의심을 입증하는
증거를 수 없이 발견한다.

드디어 그는 이웃사람에게 뛰어가서,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다.

"야, 저주받은 네 도끼를 계속 가져라" (바츠라비크 1985)

바츠라비크는 수많은 책에서 우리의 표상들이
종종 어떻게 실재를 만들어 내는지 진단했다.

우리는 실재를 자신의 투사 안경을 통해서 채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통해서
현실을 만들어 낸다.

바츠라비크는 1969년 프랑스의
모든 신문들이 대서 특필했던
오를레앙의 소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문에 따르면, 몇몇 의상실 탈의실서
여자들이 기습을 당해 마취된 채
지하 통로로 끌려갔다고 한다.

소녀 28명은 이미 행방불명되었다.  
소문은 유다인 배척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소문을 추적했을 때,
그것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소문특정한 실재관이 형성되는 데,
사실조차 필요치 않음을 증명해 준다.

뿌리 깊은 未信은,
특히 많은 사람들이
그 미신을 지니고 있을 경우,
未信 자체의
'실재 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비츠라비크 1976.87)

소문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실재를 만들어 낸다.
소문은 항상 무엇인가 남아 있다.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난 사제는,
비록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전처럼 아무런 편견 없이 지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환상과 소문을 좇아간다.

그들이 실제로 주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서 떠맡거나,
그들의 무의식 안에 떠오른
상상 속으로 끼어들어 간 표상들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관해
혼자서 생각해 보고는,
그 관념이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하여
만들어 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하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역시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하고, 허약하며, 아주 간사하고,
부정직한 등등의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상과, 그 표상을 투사하는 배후를 묻고!

하느님의 빛 안에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사물과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사물 자체는 결코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히려 사물들의 움직임을
자주 그렇게 해석한다.

그래서, 추적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전혀 주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반대하기로 결탁했다고 생각한다.

파스칼 브뤼크네는
이 결탁이론에 대한 예를 충분히 제시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현실에 맞 대면 하지 않고
자신들의 희생 이데올로기를
고집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결탁 이론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실재를 만들어 낸다.




♧♧~~
내면의 영역_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_
내면의 증인(참 자아)을
이야기한 철학자 
에픽테토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