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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 의식

4념처(四念處)수념처 (1)느낌의 발생 (2) 느낌 지켜보기

by 고요한 강 2019. 2. 19.

[4념처] 수념처
①느낌의 발생

부처님은 '느낌 지켜보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느낌 지켜보기에 머무르는가?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안다.
'기분좋은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기분 나쁜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세속적인 좋은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세속적이지 않은
좋은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세속적인 나쁜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세속적이지 않은
나쁜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속적 느낌이 생겨났구나.'

혹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속적이지 않은 느낌이 생겨났구나.'라고.

그는 자신, 혹은 타인, 혹은 자신과 타인 모두와 관련하여 이렇게 느낌 지켜보기에 머무른다.

그는 그 느낌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지켜본다.
또 그는 그 느낌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지켜본다.
그는 그 느낌들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지켜본다.

'어떤 느낌이다'고 하는 알아차림이 생겨나
마침내 '알아차림과
지켜봄'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은 채 구속되지 않는 삶을 누린다.

이렇게 수행자는 느낌 지켜보기에 머무른다."

느낌이란 것은
어떤 대상과 접촉했을 때 생겨나는 경험입니다.

여섯 가지 감관이 그에 상응하는 대상들과 만날 때는
반드시 어떤 느낌이 생겨납니다.

감각기관과 대상들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그 최초의 느낌들을 부처님은

'좋은 느낌' '좋지 않은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느낌'
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느낌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문제 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그런 느낌이 생겨난다는 엄연한 사실과 그로 인해
번뇌 망상 등의 후유증이 전개되고 마침내는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버린다는 현실입니다.

코로 역겨운 냄새를 맡았다고 합시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냄새 자체에는 역겹다거나 달콤하다는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의 코로 맡아졌을 때 인간에 의해 역겹다거나 향기롭다는 구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과정을 통해서였건 간에 냄새와 같은 물질적 현상을

'좋은 것'이라거나 '나쁜 것'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것'이라고 느끼는 어떤 조건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의식 있는 존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느낌이 인간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담배 피우지 않는 사람이 흡연자가 내뿜는 담배 냄새를 맡았을 때(코가 담배 냄새와 접촉했을 때)

'좋지 않은 느낌'이 생겨납니다.
무어라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분석하기는 어려워도 분명 우호적이지 않은 느낌이 생겨 납니다.

반대로 애연가라면 좋은느낌이 생겨나겠지요.

일단 좋지 않은 느낌이 생겨나면 곧이어 이런 저런 감정이나 기억, 의지 등이 얽혀들면서

그 느낌이 자기 인생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느낌이 성냄으로, 그리고 그 성냄이 고통스러운 삶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지요.

냄새 뿐만 아니라
색이나 모습, 소리, 맛, 감촉, 생각 등
어떤 감각 대상에서 비롯된 좋지 않은 느낌일지라도 결국은 성냄(瞋心)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렇다면 좋은 느낌이 생겨났을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중략)

이처럼 좋은 느낌은 이런 저런 생각이나 기억, 감정이나 욕구와 결합하면서
급기야는 탐욕과 애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좋은 느낌은 삼독 가운데 탐욕을 증장시키는 쪽으로 발전해 가는 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은 어떻게 될까요?

저 멀리 있는 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고 합시다.

특별히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일종의 정신적 혼침 상태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느낌에 빠져들 때,
사람들은 식별력이나 이해력을 놓치는 둔감한 정신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정신적 혼침 상태는 졸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물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신적 긴장이나 집중력이 해이해지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바로 어리석음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됩니다.
결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은
이해력이나 판단력, 통찰력에 필요한 긴장과 집중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사물에 대한 미혹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전개되어 가기 쉽다고 하겠습니다.

삼독 가운데 어리석음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
왜 느낌을 '지켜보기' 수행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느낌은 탐․진․치 삼독으로 전개하면서 우리의 삶을 오염 시키고 해치기 때문입니다.

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느낌이든 간에,

그것들이 탐욕이나 애착
혹은 성냄이나 어리석음으로 발전해 가는 것은
우리들이 그 느낌에 얽혀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느낌이 생겨났을 때, 곧이어 그와 관련된 생각이나 욕구, 감정, 판단들이
그 느낌에 덧붙여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기 때문입니다.

느낌이 삼독심으로 발전하여 자신의 언행과 감정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 그저 자기를 내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이 느낌의 진행과정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일까요?
마치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을까요? ?

아닙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 개입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느낌 지켜보기가 바로
그 구체적 방법입니다.


[출처] [4념처] 수념처
①느낌의 발생|작성자 목야

[4념처] 수념처
②'느낌 지켜보기'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 주십니다.

"느낌이 일어나거든
그 느낌을 그저 지켜보라.


'나의 느낌'이라든가,
'내가 느끼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을 놓아 버리고
그저
어떤 느낌인지를 알면서
지켜보기만 하라.


느낌에 휘말려 들어가지
말고 지켜보라.

그러면 애초의 느낌에서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에 생각이나
감정, 기억들이 얽혀 들어


삼독심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의 후유증과 병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마침내 느낌의 참 모습을 꿰뚫어 보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다.

지혜(如實智)가 생겨나는 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관으로 무엇을 접촉했을 때_ 생겨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느낌의 발전과정에 얽혀 듭니다.

자신의 탐욕이나 애착, 성냄과 어리 석음이 어떤 느낌에서 비롯 되고 어떻게 발전된 것인지를 살펴보거 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느낌의 발전 과정에 얽혀들고 맙니다.
그 결과는 삼독심의 노예요 삶의 고통스런 훼손입니다.

느낌 지켜보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느낌의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와 안락의 주인공으로 재탄생시키는 통로입니다.

느낌을 애초의 상태에서 그치게 하여
삼독심을 그 토대에서부터 해소시키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은
'즐거운(좋은) 느낌', '괴로운(나쁜)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로 구분한 다음,


그 느낌들을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느낌은 이런 저런 감정이나
기억, 의지 등과 얽히면서


탐․진․치 삼독으로 진행되어 삶은 번뇌와 고통으로 물들어 버린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그 해결책으로
'느낌 지켜보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염수경》에서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 설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가지 느낌 이다.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저항(혐오)하려 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을 버려야 한다.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대하여 탐하려 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고,

괴로운 느낌을 대하여 저항하려는 고질적 성향을 버렸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하여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다면,

그때 그는 고질적 잠재성향에서 벗어나 올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족쇄를 풀어버렸으며, 아만을 철저히 꿰뚫어 보아 고(苦)를 끝낸 것이다.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미움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그리고 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어떤 지혜로운 이는 평화롭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그는 결코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나 열심히 수행하는비구가 분명히 알아차리는(지켜보기)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느낌의 본성을
꿰뚫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됨으로써 그는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다할 것 이며, 지혜가 성숙하고
법의 길에 확고하며,


수명이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에
어떤 헤아림으로도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으리."


부처님 눈으로 볼 때 중생은 버릇덩어리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시간적 기원을 추적할 수 없는 때부터,

중생은 일정한 버릇(習)들을 거듭 익히며 축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조건반사처럼 거의 무의식으로 어떤 조건에서는 어떤 반응이 즉각 나타납니다.


눈, 귀, 코, 혀, 몸, 생각에 어떤 대상들이 접하면,

그로 인해 어떤 현상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됩니다.


거듭 거듭 익혀온 버릇의 패턴대로 진행됩니다.

그런 버릇의 패턴에 아무런 자각이나 반성 없이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우리의 감관이 어떤 대상을 접하여 느낌이 생겨났을 때에도,

중생의 삶에서는 언제나 목격되는 버릇의 방식이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일 때는
그 대상을 탐하려 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불쑥 머리를 들고,


괴로운 느낌일 때는
저항이나 혐오, 미움, 성냄을 불러일으키는 고질적 잠재 성향이 드러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 때는
무지로 떨어지려는 고질적 잠재 성향이 머리를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느낌이 생기면
그 느낌에 상응하는 삼독심으
로 즉각 연결되는 버릇의 패턴들이 무수하게 반복되건만,


중생들은 그 버릇의 패턴을 눈치 조차 못차리고 그저
그 패턴 속으로 말려듭니다.


그 패턴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그 속으로 함몰되어 갑니다.

이런 정황을 부처님은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미움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그리고 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어떤 지혜로운 이는 평화롭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그는 결코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출처] [4념처] 수념처 ②'느낌 지켜보기'|작성자 목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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